J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
퇴사일이 잡힐 무렵, P는 J에게 자신의 단기 계획을 알렸다.
"6월 월급까지는 나오니까, 6월까지는 그냥 휴가 기간이다 생각하고 놀 거야."
P의 마지막 출근은 6월 첫 주이지만 남은 연차를 모두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실제 퇴사 처리는 6월 말이었고, 따라서 6월 월급을 모두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P는 휴가 기간인 양 6월을 보낼 생각이었다. J도 동의했다. 다만 6월에 P가 뭘 하고 놀지 궁금했다.
"직장인들 한 번씩 꿈꾸는 로망이 있잖아? 회사 때려친 후 공항에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표 주세요' 하는 거. 나도 해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바로 공항에 가지는 못할 거 같고 6월 안에 떠나는 건 해볼까 하거든."
이어 P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J가 동의한다면 같이 동유럽을 가고, 돈이 들거나 휴가 내는 게 맘에 걸린다면 혼자 제주도에 일주일 정도 다녀올까 해."
곧 백수인 P와 달리 J는 여전히 직장인이고 현실적으로 장기 휴가를 내기 어렵다. 당연히 J는 난색을 표했다. 어쨌거나 휴가는 팀에 양해를 구하면 낼 수 있지만 7월부터 P의 수입이 없으니 이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다. 동유럽... 동유럽은......!
사실 P는 동유럽에 큰 관심이 없다.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국가 중 유일하게 관심 있던 곳이 오스트리아였는데 오래전 홀로 유럽 여행할 때 열흘 정도 머물렀고 그때 즐길 거 다 즐겼다는 생각에 굳이 재방문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동유럽을 제의한 이유는 J 때문이었다. J는 예전부터 동유럽을 가고 싶어 했다. 가끔 TV 홈쇼핑에 동유럽 여행 상품이 나오거나, 여행 예능에서 동유럽이 나올 때면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24년에는 부모님과 동유럽을 갈 계획을 세웠고 예약도 다 했는데 부모님 사정으로 어그러졌고 J는 크게 낙담했었다. 그걸 알기에 그나마 P의 마지막 수입이 있는 6월에 J가 그토록 원하던 동유럽을 가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J가 현실적으로 고민할 것도 알기에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P가 제주도를 갈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J가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하지만 마냥 배려로 보기에는 너무도 강력한 미끼였다. 아니, 사실 배려인 '척'인 것일지도 모른다. J가 언젠가부터 소망하던 여행지. 이미 한 번 갈 기회를 놓친 상황에서 다시 기회가 왔다. J의 내면은 매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여행비도 걱정이고 휴가도 걱정인 거 알지만 작년 일을 생각해 보면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며 저 깊은 어느 곳에서 소릴 질러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J는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감지한 P는 J의 의지에 도끼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여러 번 연이어 휘두른 게 아니라, 마치 낙수물이 바위에 떨어지듯 조용히 있다가 한 번씩 쿡 찔렀다.
"예전에는 부부가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사례도 있었잖아? 뭐 지금 같은 불황에 그 사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너는 어쨌든 회사를 계속 다닐 거잖아."
"나 모아둔 돈 있어서 재취업 못해도 최소 올해 하반기까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동유럽처럼 많이 걸어 다닐 곳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야 하지 않을까?"
"내가 오스트리아에 큰 미련은 없는데 할슈타트는 하루 정도 숙박하고 새벽 풍경을 보고 싶긴 해."
"작년에 기회 날리고 아쉬웠잖아. 이번에도 안 가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
결국 J는 두 손 들었다. 아니,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 휴가 얘기해 볼게. 승인 나면 다시 얘기해 보자."
J에게는 애당초 선택지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