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 알던 "응당 삶이란 이런 것이야" 하는 삶이나 그간 내가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딴판인 삶이었다.
대학교와 회사 시절 합쳐 10년이 넘도록 살았던 강남을 뒤로 하고(관악구도 강남이라고 할 수 있다면...) 강북 종로 경복궁 옆 고즈넉한 동네 서촌으로 이사했다. 동네를 두고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가 너무 사랑스럽다. 그래서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신혼집도 신도시의 아파트 대신 이 곳 빌라로 정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서촌, 삼청동, 부암동, 경복궁, 광화문, 인왕산, 북악산, 수성동 계곡, 청계천이 원래부터 잘 아는 장소였던 것마냥 익숙해졌다. 종로부심(?)은 강해져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요즘 어디 사냐고 물으면 자동으로 "나 종로 김두한이야~"를 외친다.
백수가 된 후로 가장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시간과 요일 개념이 없어진 것이다. 기상시간, 취침시간,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고 싶을 때 가고 돌아오고 싶을 때 집에 돌아온다. 하루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으니 참 좋다. 그리고 평일과 주말, 요일 구분이 사라졌다. 평일 낮에 여자친구와 함께 훌쩍 교외로 놀러가기도 한다(여자친구도 코로나 때문에 백수가 된 건 함정...).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자주 까먹는다. 예전에는 금요일 저녁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가 일요일 밤에는 기분이 급격히다운되는 식의, 말하자면 일주일 단위로 조울증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요일의 기분 상태가 균질하다. 근데 원래 하루하루 모든 날은 똑같은 해가 뜨고 지는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참 자유롭게 지냈다. 다소 중2병스럽게 내 멋대로 굴기도 하고 한량처럼 한가로움을 뽐내기도 했다.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고 수성동 계곡에 앉아 명상도 하고 둘레길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책에 빠질 때면 서점이나 방에서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가 땡기면 빔프로젝터로 만든 나만의 영화관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영화를 보기도 했다. 지금의 생활에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 바람과 같이 물과 같이 모든 게 유유하고 부드러웠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예전보다 더 사람들과 어울렸다. 많지 않은 친구들에게 더 자주 연락할 수 있었고 독서모임 등을 통해 기존의 환경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에 대한 내 시야도 넓어졌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얼굴은 모르지만 마음이 통하는 동지 작가분들 및 독자분들과 소통했고 더러는 여기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모하게 결심했던 백수행,
퇴사 후 어쩌다 출간계약도 하게 되어 아직은 어색한 작가라는 타이틀로 책의 원고도 쓰고 있다. 그리고 얼떨결에 나에게 사건을 맡겨준 고객 덕에 초보 개업변호사로서 혼자서 이리저리 헤매며 사건도 처리해봤다. 이것저것 나만의 방식으로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봄은 저물었다.
꽃이 피어나듯 새로운 방식의 삶이 피어난 시절이었다.
그간 복잡한 낙서 같던 종이를 말끔히 지워낸 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그 빈종이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제 여름이었다.
지금까지의 약 다섯달 간의 백수생활에 대한 소회를 짧게 적어보았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금방 지나간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느새 지금의 생활이 굉장히 익숙해져 있네요.
여름부터는 좀 새로운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앞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갈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