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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May 09. 2017

제주 4.3사건을 아시나요?

제주 북촌리 너븐숭이 4.3 위령성지


엄빠 시절 신혼 여행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관광지. 중국인마저 사랑하는 관광지. 아름다운 바다에 둘러싸인 화산섬. 현무암과 유채꽃. 트렌디한 맛집과 숙소. 자유로운 영혼의 셀럽들이 이주해 가는 곳.


제주에 드나든 지 7년째가 돼서야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속살을 봐 버렸다. 이제 마냥 즐겁게 제주 여행할 자신이 없어졌다. 한 달을 심사숙고한 끝에 이 글을 쓴다.




제주의 아픈 날, 4월 3일


섬 제주는 예로부터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나라에 힘이 없을 땐 몽골의 속국이 되기도 했고, 일본군의 전략적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나라가 가난할 땐 섬 내에서 충당해야 하는 식량난에 더욱 허덕일 수밖에 없었고 전염병이 돌면 섬 안에서 죽어가기 일쑤였다. 그러한 혼란과 가난, 빈곤, 공황이 팽배한 시대에 4.3사건이 발발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 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어려운 말로 정의된 4.3사건.


축약하면 "국가 권력에 의해 3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학살당한 주민의 유족, 친인척, 지인이 받을 고통까지 감안하면 당시 30만이었던 제주 인구 전체가 희생자인 셈이다.


남북 분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빚어진 이념 갈등, 인권 유린에 대한 몰지각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북촌리에서 본 4.3사건


4월 3일 제주에 머물렀으면서 추념식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북촌리에 위치한 너븐숭이 4.3 위령성지를 찾았다. 집단 학살 희생자가 많았던 북촌리에서의 사건을 더 깊숙이 조명한 곳이다.



기념관 주변으로 유적지가 모여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위령비


애기무덤


북촌리의 4.3 역사를 집중 조명한 기념관


학살당한 희생자의 이름이 하늘 높이 탑을 이룬다.


이름도 모를 아이들까지 총살 당했다는 기록.


갓난 아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이 장면, 실화다.


이 증언 역시, 실화다.


아이고 사건 역시, 실화다.


이런 참혹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가족이 학살당한 지 6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고 아이고" 통곡한 것이 죄가 되었다는 아이고 사건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유족들은 연좌제로 처벌당할 것이 두려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43년이 지나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짊어졌을 상처와 한이 상상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진상 규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53년이 지난 2000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국가 권력에 의한 희생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의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유족에 대한 보상 등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북촌리


북촌리는 제주에서도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조용한 마을 중 하나다. 50여 년 전 집단 학살이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이 평화로운 마을을 걷고 북촌리와 함덕리를 잇는 서모오름에 올랐다. 보통 '서우봉'으로 불리는 오름의 이름이 일제 잔재라고 하여 주민들은 '서모오름' '서모봉'으로 불리길 바란다고 한다.



4.3사건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을 살아가는 희생자 유족들에겐 현재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좇는 이방인과 그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주민들. 그 괴리감에 의연해지려면 내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pilogue]


해설가 할아버지


북촌리의 4.3 역사를 영상으로 보며 눈물이 삐죽 나오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역사, 정치, 사회 지식이 짧은 나로선 도대체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극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주위를 기울여봐도 단어 하나하나가 어려워 해설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장대는 뭐고 토벌대는 뭐예요?"



이윽고 그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4.3사건을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비극"이라 표현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 민주주의가 자리 잡게 된 과정을 말하며 그 시절 어쩔 수 없었던 이념 갈등에 대해 생각게 했다. 이어 오바마케어를 말하며 이념을 뛰어넘는 현시대 정책의 가치관에 대해 생각게 했다.


나의 지식이 짧아 그의 주옥같은 해설을 모두 흡수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올바른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달았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제주 4.3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지슬'을 다시 봤다. '지슬'은 '감자'의 제주 방언이다. 토벌대를 피해 동굴로 피신한 주민들의 이야기, 주민들을 폭도라며 살해하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흑백영화다.


"내 오마니도 빨갱이 손에 갔소. 내래 빨갱이 새끼들이 되게 싫소"라고 말하는 군인에겐 죄의식이 없다. "빨갱이가 뭐길래.."하며 할머니는 아들에게 줄 지슬을 챙기며 죽는다. 방향 잃은 이념 갈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제주 북서부 중산간에 위치한 '큰 넓궤'라는 동굴은 토벌을 피해 온 인근 마을 주민들 120여 명이 50~60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그러나 결국 토벌대에 발각되어, 보초를 서던 마을 청년들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한라산 근처에서 대부분 붙잡히고 만다.


그들 대부분은 1948년 12월 24일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총살되어 바다에 버려졌다.


4.3 당시 학살된 제주도민은 3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이었다.


대량 학살은 미군정(1945~1948)에서 시작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까지 1년에 가까운 '초토화 작전'의 시기에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는 미군정과 미국고문관이 있었고,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이 학살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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