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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May 13. 2018

쿠바는 억울하다

첫인상


하바나 호세마르티국제공항 터미널3.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긴밀한 탐색이 시작됐다.


탁한 붉은색 인테리어. 칙칙한 조명. 후텁지근한 공기.


입국심사대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졌다.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열려줄까? 잘 숨겨놨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편견이 슬그머니 고개 내밀었다. 어느 줄에 서야 하나 고민할 때 한 사람을 발견했다. 저 사람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 뒤에 가서 섰다. 혼자 온 서양인 여행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 교환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당신도 지금 내 마음 같군요. 그녀가 심사받는 동안 마음으로 응원했다. 무사히 통과할 때 함께 안도했다. 쿠바 입국심사대는 그런 힘이 있었다. 다짜고짜 인류애를 조성한다. 이제 내 차례. 안경 등 너머로 건너보며 오라고 손짓하는 직원. 평생 한 번도 웃어본 적 없을 것처럼 생겼다. 그래도 나는 웃자. 여유로워 보이자. 아자아자. 걸음을 떼며 뒤를 살짝 돌아봤다. 딱 내 마음처럼 응원해 줄 것 같은 여행객이 서 있었다. 내 마음처럼 내 뒤에 줄 섰겠지. 응, 잘 해 볼게. 고마워!


"Hola!"

- Hola

인사를 받아줬다. 이게 뭐라고 기쁘냐.


"Passport"

- (Here)

"Visa"

- (Here)


슥슥. 탕, 탕. 들어가도 좋다는 고갯짓.

응? 이게 끝이야? 질문 없어? 리얼리? 그녀는 나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나의 여권과 비자면 되었다. 이러면 여태 쫄려한 내가 뭐가 되니. 그래도 끝까지 표정 관리하기. 웃자. 여유로워 보이자. "Thank you. Gracias!" 그제야 그녀가 살짝 웃어 보였다. "Gracias" 


그렇게 1단계 통과. 다음은 보안검색대. 특이하다. 시설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기류가 묘하달까. 직원들이 하나같이 무표정하고 심드렁했다. 딱 일해야 할 만큼만 하는 느낌. 바구니 하나에 짐 하나, 철저히 검색하는 여느 나라들과는 달랐다. 보안검색도 프리패스. 2단계 통과.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캐나다에서 온 사람은 오른쪽, 캐나다 아닌 데서 온 사람은 왼쪽. 뭐지? 캐나다 특별대우? 길 중간에 웬 책상이 놓여 있고 직원 몇이 앉아 있었다. 2차 입국심사인가? 그래, 아까 너무 쉬웠어. 걸어오는 나를 보며 "Canada?"하고 묻기에 "Yes, Toronto"하며 티켓을 꺼냈다. 또 프리패스. 걸음을 멈출 필요도 없었다. 뭐야 여기. 3단계도 통과.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를 지났다. 웬 직원이 내게 눈짓한다. 지루해 죽겠다는 듯 벽에 기대 서서. 말없이 벽에 붙은 종이를 가리킨다. 아~ 세관신고서? 어어 여기. 아니 왜 길에 서서 이걸 받아? 책상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서서? 접힌 채로 줬는데 펼쳐보지도 않는다. 또 프리패스. 4단계도 토..통과.


쿠바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입국심사대와 보안검색대. 노란 가디건이 내가 응원한 그녀.
입국 중엔 주로 영상을 찍었는데, 시선이 다 이렇다. 그알도 아니고.
그 와중에 반가웠던 삼성. 아이폰 쓰면서.






시간은 많다. 공항에서 짜이와 만나기로 했다. 짜이가 타는 비행기는 나보다 늦게 출발했고 정체 모를 섬에 들렀다 올 것이므로 족히 5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첫 번째 여행은 공항, 너로 정했다


공항 2층 바깥 벤치에서 콧바람부터 쐬고 시작.


일단 환전부터 하자.

1층 인포데스크에 갔다. "Where is.. Money Exchange..?" 영어듣기평가 모드로 귀 쫑긋 준비한 채 물었다. 근데 바로 뒤를 가리킨다. 어디? 저 기계 말하는 거야? "Machine?" 그렇단다. 혼란스러웠다. 듣도보도 못한 방법이었다. 우리나라에 정보가 너무 없는 건가? 내가 너무 안 찾아봤나? 쿠바가 빠르게 변화 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계 앞에도 직원이 있었다. 역시나 무표정하고 심드렁하게.


처음엔 기계가 고장 난 줄 알았다. 너무 느려서. 사실 이 안에 사람이 숨어서 돈 세고 있는 거 아닐까 상상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지루할 지경이었다. 화면이 뜰 때마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면 직원이 나타나 버튼을 눌러주고 갔다. 불안한 마음으로 한 세월 기다리고 있으면 또 나타나 "걱정하지 마. 문제없을 거야" 하고 가고. 아니 그럴 거면 지켜 서서 도와주면 안 돼? 싶을 때 또 다른 직원이 나타나 지켜 섰다. 막상 둘이서 말없이 기계만 바라보니 숨 막혔다. 그 친구도 그랬는지 또 갔다가 와서는 힐끗 보더니 다시 가고. 자기네가 보기에도 너무 느렸는지 뭔가 상의하다가 가고. 직원 세 명이 돌아가며 툭툭 참견했다. 친절도 아니고 불친절도 아닌, 걔네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문제의 ATM 기계


"Thank you" 아차, 그라.. 뭐였더라.. "그라시ㅇ..?" 했더니 쿡쿡대며 "Gracias"라고 알려준다.

"아! Ok. Gracias!" 

잇몸 만개하는 미소가 돌아왔다. 어쩐지 쿠바가 좋아질 것 같았다.


이제 와이파이카드를 사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 돌아다니는데 자꾸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공항 직원이 저렇게 훤칠할 일인가. 그가 내게 눈 맞추며 다가왔다. 


"Hola!" 

헉. 어어 올라..! 


"뭐 도와줄까?" 

어어 나 와이파이카드 파는 데 찾고 있어. 


"여기 끝으로 가서 오른쪽에 어쩌구저쩌구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있어. 이리 와봐. 이 길을 따라서 쭉 가다가 오른쪽이야. 알았지?" 

어.. 고마워.. 뭐야 왜 이렇게 스윗해.. 이 나라 뭐야..


공항에서 만난 쿠바노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일하는 중인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유롭다. 자기들끼리 수다 떨고 있거나,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니거나, 멍 때리고 있는다. 뭘 물어보면 못 들은 척할 것만 같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먼저 손 내민다. 딱 적당히 돕는다. 그리고 다 너무 느낌 있게 생겼다. 직원 과반수가 젊은이. 얼굴뿐 아니라 몸도 느낌 있다. 유니폼 밖으로 피지컬이 폭발한다. 몸뿐만 아니라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액세서리도 화려하다. 그런 태로 흐느적거리며 일하고 있으니 몸만 억지로 거기 있지, 마음은 콩밭(클럽이라거나)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여행 전부터 주변의 관심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쿠바는 동경받기에 충분하다. 쿠바에 가 본 사람도, 가 본 사람을 본 사람도 거의 없다. 좀 아는 사람도 쿠바가 모든 여행자의 로망이라며 동경에 동경을 더했다. 관심은 질문 공세로 이어졌다. 언제 가? 며칠 가? 누구랑 가? 몇 시간 걸려? 숙소는 예약했어? 뻔한 질문 사이에 흥미로운 질문이 섞여 있었다.


"쿠바 안 위험해?"


매번 반문했다. "왜 위험해?" 속 시원히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돌아온 답이 '남미 쪽이니까'였다. 하지만 쿠바는 북미에 속한다. 그만큼 모르는 거다. 아니, 관심 밖이다. 모르는데 위험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유가 뭘까? 또 다른 질문에 실마리가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 아니야?"


주변에 가 본 사람 없는, 잘 모르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그런 나라다. 무의식 중에 '사회주의 = 위험하다' 공식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South Korean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전(휴전) 국가에 살고 있었잖은가. 이 생엔 결코 가 볼 수 없을(것 같았던), 잘 모르는, 사회주의 국가. 65년 간 머리맡에 놓고 살아온 북한과 쿠바가 닮았다. 툭하면 핵미사일을 쏘겠다던 위험한 나라 말이다.


쿠바는 정말 위험할까?

떠나기 전 인터넷 세상에서 내가 찾은 답은 '모르겠다'였다. 누구는 위험하대고 누구는 안전하단다. 사실 정보 자체가 별로 없다. 내가 겪어보는 수밖에. 긍정과 부정이 갈리는 상황이면 먼저 긍정에 기대어본다. 어쨌든 총기 소지 국가는 아니니까 죽진 않겠지. 내 눈으로 보고 겪은 쿠바를 믿으리라. 그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나도 어쩔 수 없는 South Korean이었나 보다.

고작 일주일 다녀와 놓고 말하긴 뭐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일주일의 쿠바는 안전했다. 캄캄한 새벽에 다녀도 무섭지 않았다. 모든 쿠바노가 친절했다. '친절'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만큼. 호객 행위를 해도 끈질기지 않았다. 호객을 넘어 가벼운 사기를 쳐도 그 수위가 귀여웠다. 모르는 척 한번 당해주고 싶을 만큼.


이쯤 되니 쿠바 이 친구, 좀 안 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무턱대고 오해받잖아. 내가 다 억울하다.


다녀와서도 여러 차례 질문받았다.

"쿠바 안 위험했어?"


그럴 때마다 답했다.

"전혀. 우리가 우리를 위험하게 했지"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벤치에 앉아 캐리어에 다리 올리고 한숨 잤다. 공항에서 5시간째. 짜이가 와야 할 시간이 지났다. 인터넷이 안 되니 연락할 방법이 없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터미널로 도착했을 수도 있다. 여기로 오려면 한 시간은 걸리겠지. 다운 받아온 영화를 봤다. 7시간째.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짜이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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