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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May 22. 2018

이산 친구 상봉

여행은 언제 시작해?


"이게 다 내가 가난한 외노자이기 때문이야"


나중에서야 짜이가 말했다. 살이 쪘지만 바지 살 돈이 없어서 레깅스만 입고 다니는 처지니까. 그러니까 초초초저가 티켓을 끊은 거고, 우리가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된 거고, 자기 혼자 정체 모를 섬에도 들른 거라고. 그리고 나를 만나기까지 그 고생을 했던 거라고.

조금 슬프게 들렸다. 하바나 공항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을 때의 짜이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 기다리는 7시간 동안 공항에서 이너피스를 찾은 나와는 정반대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바나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짜이가 도착하는 터미널이 2인지 3인지 불분명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나도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재차 확인해봤다. 저가 항공이라 뭔가 체계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마냥 의심). 어쨌든 내가 도착하는 터미널3에서 만나기로 했다. 짜이가 터미널2에 내리면 3에 찾아오기로. 호세마르티국제공항에 대한 정보가 적어서 어려웠지만, 조각 정보를 참고해 규칙을 정했다.

1) 터미널3, 출발층인 2층에서

2) 구역이든 뭐든 나눠져 있을 테니 ABC 순이면 'A'에서, 123 순이면 '1'에서

3) 구역이 없거나 애매하면 인포메이션 부스 앞에서

4) 인포메이션이 없으면 환전소 앞에서

완벽했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A'가 보였다. A구역의 끝에는 커다란 창과 긴 벤치가 있었다. 프랑스 항공사 앞이라 멋쟁이 프렌치를 원 없이 봤다. 오후 햇살이 예뻤다. 거기에 있는 내가 참 맘에 들었다. 그 사이 짜이가 하고 있을 고생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짜이 생각을 하긴 했던가?


호세마르티국제공항 터미널3, 2층 A구역



이제부터 짜이의 행보를 좇아본다

(짜이 일기를 편집, 짜이 말투 빙의)


혬이 무사히 보딩에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짜이는 나를 혬이라고 부른다. 이제 나만 잘 가면 된다. 쿠바 비자부터 구매하자! '쿠바 비자를 구매해야 한다. 에어캐나다만 기내에서 무료로 배포한다'는 정보뿐, 에어캐나다가 아니면 어디서 어떻게 구매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체크인하며 물어봤지만 당최 못 알아먹겠다. 구글캐나다로 검색했을 때 Air Transat도 기내에서 나눠준다는 문구를 본 것 같다. 그마저도 영어라 확신할 수 없지만 대충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항공사 직원에게 한번 더 물었다. 쿠바 비자 어디서 사? "기내에서 무료로 나눠줘" 오오오 드디어 안심! 나는 해냈도다. 해내긴 뭘 해내 ㅋㅋ 대체 누가 따로 사라고 했냐. 세상 모든 정보가 검색하면 넘쳐나서 문젠데 쿠바 정보는 절레절레. null 값이다. 그래서 우리가 남기기로 했지.


날 새고 비행기 탄 자의 최후는 처참했다.

헤드뱅잉 중에 쿠바 비자를 받았다. 비몽사몽. 얼른 쓰고 다시 자려는데 왓 더 뻑! 잘못 썼다. Last Name에 First Name을 써 버린 것. 쿠바 비자는 한 글자라도 잘못 쓰면 새 종이에 다시 써야 된다고, 안 그럼 입국 금지라고 들었다. 식은땀 줄줄. 급히 승무원을 불렀다. 나 잘못 썼는데 어떡해? 괜찮아? 어떡해?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다시 시도해봐" 응? 새 종이 안 줘? 이대로 그냥 쓰라고? 식은땀 줄줄. 근데 왠지 느낌상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심각한 거면 승무원이 저렇게 대답하지 않았겠지? 찍찍 긋고 다시 쓰고 잤다. 헐 또 잠이 오냐..


매우 작은 비행기였다. 승객들의 평균 연령이 높았는데, 옆 사람과 대화하고 친해지는 분위기였다. 관광버스의 비행기판 같았달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잤다. 잘했다. 카요라르고델수르에 도착했을 때도 반수면 상태로 있었다. 내릴 사람은 내리고 탈 사람은 타는 줄 알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나만 가만히 앉아 있네. 뭐지 나 빼고 다 카요라르고델수르에 가는 건가. 나만 태우고 하바나 가는 건가. 말도 안 돼. 승무원에게 물었다. 나 하바나 갈 건데 내려? "응, 내렸다가 타는 거야" .... 응. 버스터미널 같은 공항에 있다가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도 아니고, 그 비행기 그대로. 그 사이 청소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님. 대체 왜 내리라고 한 건지 알 수 없음. 하바나 도착했을 때 승객들은 다들 친해져 있었다. 서로 여행 잘 해라, 드디어 우리가 하바나에 도착했네 어쩌네 하면서 흥겹게 헤어졌다. 나만 근심 가득이었다. 비자 오타 괜찮을까...?


입국심사대 앞에서 개긴장 후암 후암. 너도 그랬구나.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타 있어도 아무 문제없는 거였다. '쿠바 비자는 종이 한 장에 좌우 똑같은 정보를 적는데, 입국할 때 반 뜯어가고 나머지 반을 돌려준다, 그걸 절대 잃어버리지 말고 가지고 다니다가 출국할 때 내야 된다' 그랬는데 뭐야. 뜯지도 않는다. 너도 그랬구나. 이놈에 옛날 옛적 쿠바 정보 모조리 업데이트해 주고 싶다. 아오. 그 후로도 아무도 내 짐과 서류 따위에 관심 가지지 않았다. 다 그런 거였나봐! 공항 같질 않았다. 흡사 홍도 배 타러 가는 여객터미널 분위기.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호세마르티국제공항 터미널2


여기서부턴 짜이 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짜이 말투 주의)


뭐야 이게 밖이야? 터미널을 나온 것인가? 혬을 터미널 안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본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여긴 공항 터미널 같지가 않다. 출구도 딱 하나. 거길 통과하면 밖. 쌩 밖. 갑자기 거리. 동공 지진. 개 지진. 아무래도 여긴 혬을 만나기로 한 곳이 아닌 것 같다. 아닐 것이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

"여기 터미널3이야? 설마 2야?"

- 터미널2

"헐"


다른 이에게 물어본다.

"여기 터미널2야. 그렇지?"

- 응 맞아

"하아"


폰을 본다. 지도를 본다. 그러나 노 인터넷. 오프라인에서 되는 구글번역기와 맵스미를 쿠바 도착해서 다운 받으면 되지 뭐, 하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다. 아니... 솔직히 그런 생각도 안 했다. 그냥 다 어찌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과...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폰도 무용지물.


다시 아무에게 물어본다.

"대체 터미널3은 어딨어?"

- 요래 조래 저래 슝ㅇㅇㅇ 가면 어쩌고저쩌고

"아 됐고. 걸어서 몇 분인데?"

- 걸어서? (날 이상하게 본다)

"응 걸어서"

- 못 가

"헐"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가이들이 있었다. 돌아가며 말 건다.

"너 터미널3 가고 싶지? 택시 타면 돼"

- 얼만데

"7"

- 안돼 나 돈 없어


다른 가이가 온다.

"7"

- 안돼 비싸


멍 때리고 있는데 아까 그 가이가 다시 온다.

"5에 해 줄게"

- 안돼 3에 해줘

"안돼 어쩌고저쩌고"

- 3 아니면 안 돼 돈 없어

"아씨, 알았어 타"


짜이가 탄 첫 쿠바 택시


오, 이게 말로만 듣던 올드카인가!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이상하다. 나한테 흥정하던 그 가이는 조수석에 타고, 운전석에는 다른 가이가 있다. 이건 뭐지. 어딘지도 모르는 터미널3에 가는 길. 지도도 볼 수 없음. 불안감에 카메라를 든다. 증거를 남겨야 한다. 이 낯선 곳의 나의 행보를,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찍는다. 창 밖의 날은 좋았다. 그래, 이렇게 좋은 날 가는 것도 복이지.


짜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담은 ‘그 가이’


다행히도 터미널3에 도착했다. 캐나다달러 3불을 동전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거부당했다. 페이퍼 머니만 받는단다. 지폐랑 동전이랑 똑같은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완곡했다. 미친. 결국 지폐로 5불을 내고서야 내릴 수 있었다. 그 가이는 나를 건물 안까지 에스코트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부담되는데. 그는 끝까지 친절. 나는 끝까지 경계. 응 잘 가! 고마워!


이제 혬만 찾으면 된다.


2층을 돌아다니고 또 다녀보지만 혬따윈 보이지 않는다. 위아래 층 왔다 갔다 하며 "여기 1층 맞지?" "여기 2층 맞지?" 확인했다. 배낭은 무겁고 햇살은 뜨겁고 배도 고프고 처절했다. 여기에 있어보고 저기에 있어봐도 혬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 넓은 토론토 공항에서도 우린 만났었는데. 얼마나 차이 난다고 따로 티켓팅 했나 싶었다. 밖에 나갔나, 환전하러 갔나, 화장실 갔나 다 다녀봤지만 혬은 보이지 않았다. 처량했다. 그저 처량했다. 공항에서 못 만나면 첫날 가기로 한 까사에서 만날 수도 있는 건데 그저 처량했다. 안 되겠다. 사람들한테 혬 사진 보여주면서 "이 아이를 보았나요?"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못 찾으면 또 뭔가를 타고 까사로 가야겠구나, 고되다. 이런 생각하며 배회 중 우린 극적으로 만났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울고 싶었다. 나는 1번 출구 주변을 배회했는데 혬은 A구역에 있었다고 했다. 정 반대편이었다. 그녀는 신나 보였다.


짜증 났다.


억지로 웃어주는 짜이. 1번 출구 앞에 세워놓고


혬과 올드카 타고 까사로 향했다. 공항을 벗어나 달리는데 올드카 가이가 차를 세운다. 내려서 친구와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아까 '그 가이' 아닌가!


좌 올드카 가이, 우 '그 가이'


그제야 웃으며 그와 인사할 수 있었다.

"Oh, Friend!"


나중에 알았다. 쿠바 택시는 조수석에 기사 친구가 동행하는 일이 잦다. 쿠바노들은 심심한 걸 못 견뎌하는 것 같다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본래 이 여행기는 짜이와 함께 쓰는 팀 매거진으로 기획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 리듬이 달라져 버렸다. 쿠바 여행 후, 나는 졸지에 깁스 신세를 지며 강제 잉여가 되었다. 가난한 짜이는 타임 알바를 구해야만 했다. 인기 있는 수플레 맛집이라고 했다. 토론토에서 제일 좋아하는 동네인 켄싱턴 마켓에 있다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화이트 잡 아닌 일은 졸업 후 처음이라 무척 고되지만 정말 재밌다고,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바빠졌다. 안 그래도 일분일초 아낌없이 노느라 바쁜 사람이다. 일 때문에 노는 걸 포기할리 없다. 자연히 잠을 줄였다. 제대로 잘 땐 2~3일 거뜬히 잘 정도로 잠 많은 애가. 바쁨 때문에 기록 욕심을 포기하는 사람도 아니다. 출퇴근길에 짬짬이 메모장에 쿠바 글을 쓰거나 사진을 골랐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욕심쟁이가 바쁘게 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좀 다른 차원이었다. 그 열정과 욕심이 나의 것과 닮았기에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짜이가 지금 긴 여행 중이라고 생각해.
여행 중에 다른 여행 얘기를, 완성된 글로 쓴다는 게 보통 노력으론 힘들잖아.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현재의 여행을 최대한 마음껏 즐기는 거 아닐까?
쿠바 여행기는 내가 열심히 남겨볼게.



짜이가 캐나다 워홀 막차녀의 삶을 즐기길 바란다. 그리고 미래에 그 긴 여행을 남겨주길 바란다. 거기에 쿠바 에피소드가, 나와의 추억이 기록될 테니. 그때 이 여행기를 참고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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