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침
새벽 6시, 요란한 참새 소리에 깼다.
새소리로 시작하는 아침이라니. 낭만적이다. 새벽 동트는 하바나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악! 이게 뭐야! 탁한 매연이 숨에 들어와 박혔다. 이 정도 대기 상태면 서울 미세먼지 급. 면역력 고자인 짜이는 벌써 코찔찔이 비염 환자가 됐다. 언제쯤 적응될까? 라운지로 나가 거리를 내려다봤다. 깜깜하고 조용한 거리에 청소부뿐. 아주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 30분 후 동이 트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에 차가 쏟아져 나왔다. 모든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Desayuno 먹고 싶다.
'Hola' 'Gracias' 다음으로 배운 스페인어가 'Desayuno(=아침밥)'다. 아침에 라운지로 나오면 무료로 조식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어제 시오마라 가이는 Desayuno를 스무 번 정도 말했다. "Breakfast?"라고 재차 물었지만 그는 "Desayuno"라고 재차 답할 뿐이었다. 무척 진지하게, 조근조근하게, 깊은 눈동자로 나를 굽어보며. 시간은 알려주지 않았다. 몇 시에 먹냐고도 몇 번 물었지만 아침 아무 때나 나오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말 '아무 때나'겠어? 몸은 에어컨 나오는 방에 누웠지만 청각과 후각은 온통 바깥을 향했다. 행여나 조식 놓칠라. 평소엔 아침 먹지도 않으면서.
"Hola!"
인기척에 주방에 가 보니 웬 할아버지가 뭔가 하고 있다. 조식이 틀림없다.
"Desayuno?"
- Yes~ Breakfast. Sit there.
"오예!"
이 할아버지는 영어 하시네? 그나저나 느낌 있게 생기셨네.. 정말이지 쿠바노들이란..
투박한 모닝빵과 에그 스크램블, 싸구려 소시지, 베리 요구르트와 커피. 특별할 것 없는 메뉴지만 쿠바 음식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서인가, 첫인상부터 합격이다. 빵을 반으로 갈라 가운데 에그 스크램블과 소시지를 넣고 한 입 베어 물었다.
헉.
"야 이거 존맛탱"
요구르트를 마셨다. 헉. 커피도 헉. 뭐지? 왜 맛있지? 진짜 맛있는 거 맞나? 내 미각이 객관성을 상실했나? 모르겠다 일단 먹자. 눈 깜짝할 새 접시가 비워졌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다. 내 입에서 짜이 전용 대사가 튀어나왔다.
"더 달라고 할까?"
주방에 찾아가 수줍게, 그러나 결연하게 말했다. 더 먹고 싶다고. 베리 딜리셔스하다고. 멋쟁이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흔쾌히 "Yes". 노련한 손놀림에 새 에그 스크램블이 뚝딱 만들어졌다. 아까처럼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어 짜이와 나눠 먹고 요구르트 한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식사가 끝났다. 흡족하게.
뜨거운 태양이 금세 실내로 스며들었다. 간밤에 씻지도 않은 채 곯아떨어진 탓에 온 몸이 끈적거렸다. 그래도 뜨거운 커피. 핑크색 보틀에 담긴 진한 커피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시는 게 시오마라의 룰인가 보다. 에스프레소 문화와 비슷하지만 에스프레소는 아닌. 에스프레소 맛은 모르지만 쓰고 진한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취향 저격이다. 벌컥벌컥 먹고 싶었지만 잔이 작은 관계로, 홀짝홀짝. 열댓 번을 따라 마셨다. 그러느라 계속 보틀 뚜껑을 여닫았는데, 뚜껑이 열려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 손이 쓱 다가와 뚜껑을 닫았다. 얼마 후 뒷정리를 마친 그는 할 일이 끝났다는 듯 귀여운 백팩을 메고 퇴근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뚜껑을 닫아주고는.
다음 날 알았다.
미각이 잠시 객관성을 상실한 게 맞았다. 그래도 요구르트와 커피는 최고였다. 접시 위로 날아드는 볕도.
고장 한번 없이 잘 쓰던 필름 카메라가 갑자기 먹통이 됐다. 셔터가 눌리지 않는다는 걸 토론토에서 발견한 것. 어렵게 배터리를 구입해 교체하고 별 짓을 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왕복 티켓 140만 원 들여 쿠바까지 와서는 셔터 한번 못 눌러보게 생겼다. 소중히 싸들고 온 필름 25통이 처연하게 기다리는데. 한데 어쩐지 조바심은 나지 않았다. 위기일수록 차분해지려 애쓰는 성격 덕인가. 폐차 직전인 차도 고쳐 쓰는 민족이잖아? 이깟 카메라쯤이야! 껌이겠지! 하는 믿음을 믿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카메라 수리점 위치를 물어 찾아갈 심산이었다.
가여운 내 '메라', 기운 내!
나갈 채비를 마치고 녀석을 응원하다가 습관대로 셔터를 만졌다.
철-컥
"?"
나의, 짜이의, 같은 방 게스트 수경의 시선이 일제히 카메라에 꽂혔다. 셔터가. 눌린 건가? 일시적인 걸 수 있다. 어제도 한 번은 눌리더니 다시 먹통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도. 필름 감기 레버를 천천히 신중하게 움직였다. 렌즈 캡을 열었다. 제발. 사알살, 셔터를, 꾸욱.
철컥,
"된다!!!"
- 헉 진짜? 되는 거 맞아? 뭐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안 했어. 근데 되는 거 같아. 나 사진 찍고 올게!"
이게 생시라면 이 기쁜 순간을 첫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 곧장 라운지로 나가 거울 앞에 섰다. 다시 한번, 필름 감고, 셔터 꾹.
철컥,
"진짜 된다!!!"
아침부터 눈으로만 담아둔 햇살을 바삐 옮겨 담았다.
원인은 모른다. 왜 안 됐었는지, 어째서 갑자기 된 건지. 어쨌든 된다는 게 중요하다.
상쾌한 시작이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술이다. 다이키리(Daiquiri)는 럼을 베이스로 한 쿠바 대표 칵테일. 럼, 라임 주스, 설탕만 넣고 제조하는데 사탕수수 산지인 쿠바이므로 그 맛이 굉장하다고. 궁금해 죽겠다. 티켓팅 전부터 짜이와 다짐했다. 밤낮 가리지 말고 마시자. 한 번은 짜이가 '1일 1모히토' 하자는 말실수를 했다가 급히 정정하기도 했다. 벌칙이야? 왜 한 잔만 마셔야 돼? 왜 모히토만 마셔야 돼?
시오마라 근처에 있는 핑크색 건물에 다이키리 맛집이 있단다. 그런데 아무리 다녀봐도 모르겠다. 연핑, 진핑, 인디핑, 은은핑 대체 어떤 핑에 있는 거야...? 때마침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어제 통역 도와준 한국인 게스트와 그 친구. 이 앞 골목 꺾으면 있는 집인데 거기 별로란다. 진짜 맛집은 따로 있단다.
"저희 지금 그쪽으로 가는 길인데, 따라오실래요?"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