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 모드
두 사람이 안내한 다이키리 맛집은 배틀트립에 나온 헤밍웨이 단골집, 라 플로리디따(La Floridita)였다. 그 방송 보고 다이키리에 꽂힌 건데! 의도치 않게 그곳에 온 것이다. 럭키!
...인 줄 알았으나 닫혔네. 아직 오픈 전인지, 브레이크 타임인지 있다가 오란다. 좋다 말았네. 아니 그런데, 바로 앞이 하바나의 관광 명소 오비스포 거리(Obispo Street) 아닌가. 럭키!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같은 곳. 귀국 전 기념품 쇼핑한다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기념품이라는 게 원래, 살 수 있을 때 사 둬야 후회 없는 법. 스페인어 능통한 장기 여행자가 물건 퀄리티 검수해줘, 흥정해줘, 여행 시작하자마자 지갑이 열린다 술술 열려. 후회하게 될 줄도 모르고.
"저희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아서 따라 갈게요"
목적 없음이 목적인 우리와 목적 달성을 위해 걷는 그들.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자꾸 거리가 벌어졌다. 잃어버렸다 결국. 카메라 필름 바꾸는 사이에. 굳이 찾아 나서진 않았다. 마음으로 감사 인사만. "잘 됐다"
짜이와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고의 여행 메이트다. 무엇보다 여행 속도가 잘 맞는다. 둘 다 느려 터졌다. 개, 고양이, 꽃, 의외의 색감, 독특한 간판, 노인, 연인. 뭐 하나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걷다가 찍다가 기다려주다가 서로를 찍는다. 흥미 느끼는 분야와 농도가 비슷하다. 따로 즐겨도 고개 들어보면 사정거리 안에 있다. 그러니 인파 속에 떨궈놔도 잃어버릴 일이 없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 줄로 묶어서 끌고 다녀야 된다고 하는데, 혬이랑 다니면 안 그래서 좋아"
- 누가 누굴 묶겠어 똑같은 사람끼리
오프라인 지도 앱 맵스미(maps.me)는 쿠바 여행 필수 준비물이다. 되게 허접하지만 의지할 데 없는 오프라인 환경에서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나름 인기 스팟도 표시돼 있다. 근처 호텔에 '헤밍웨이의 방'이라는 표시가 있어 쓱 들어가 본다.
호텔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
헤밍웨이는 몇 해를 하바나에 살며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단다. 1층에 그 시절 사진이 전시돼 있다. 시간 맞춰 가면 그가 묵었던 객실도 구경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귀찮다.
"나가자"
짜이는 디자이너. 나는 디자인 근처에서 일하는 기획자. 허름한 서점은 당연히 우리의 흥밋거리다. 사회주의 국가의 출판물은 어떤 생김일까. 체 게바라 얼굴이 대문짝 만하게 실린 책 표지들이 시선을 앗았다.
책뿐 아니라 LP와 포스터도 있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호세 마르티와 'Revolucion'이 주요 콘텐츠인 것 같다. 혁명이고 이념이고 나발이고 잘 모르겠는데 체 게바라가 쾌남은 쾌남이네. 그리고 의외로 포스터 디자인이 훌륭하다. 특이한 건 브릿팝 아티스트 포스터가 여럿 있다는 점. (음악의 나라답게?) 브릿팝 마니아인 짜이는 하마터면 여행 내내 곱게 말린 신줏단지를 모시고 다닐 뻔했다. 하지만 이성의 승리가 아쉬운 퀄이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나라도 살 걸 그랬나.
평소에 쓰고 다니지도 못할 모자도 사놓고.
쓸데없는 '쿠바 갔다 왔어요'템도 사놓고.
왜 그런 레어템을 놓쳤는가.
됐고, 배고파 죽겠다 밥이나 먹자
밖에서 사 먹는 첫 음식을 실패하고 싶진 않았다. 메뉴는 무조건 랑고스타(Langosta). 밴드 공연도 있음 좋겠고, 너무 덥지 않았음 좋겠고, 모히토도 팔았음 좋겠고, 사람도 좀 많은 데면 좋겠는데 입으로는 "아무 데서나 먹자"면서 오비스포 거리를 빙빙 돌았다.
쿠바 음식 어때? 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식도락 불가능, 술도락 훌륭"
랑고스타의 등장에 기분이 몹시 차분해졌다. 우리나라에선 비싸서 못 먹는 음식이 쿠바에선 만 원 안짝이라니 실컷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맛이 그 맛이 아닌 거다. 원재료의 신선함이면 충분하다는 식. 섬 지역 음식의 특징인가. 가까운 제주만 봐도 그렇다. 옛날 해녀들이 횟감 숭덩숭덩 썰어 넣고 된장 풀어 간만 맞추어 먹던 게 제주식 물회라고 한다. 근대 들어서야 육지 교류하며 고춧가루 공급/수요가 활발해지고 조리법이 다양해진 것. 전통 음식에는 '고립되어 자급자족해야 하는데 가난하기까지 했었다'는 티가 난다. 쿠바 음식이 그렇다. '요리!'라기보단 끼니에 가깝다. 양은 또 왜 이렇게 적어. 우리 짜이 배고프게.
식食이 불러온 차분함도 잠시.
칵테일이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사탕수수 칵테일.
주문하면 기다란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짜내어 제조해 준다. 재료도 맛도 다이키리와 비슷하다. 럼 들어간 건 너무 세고, 안 들어간 건 밍밍해서 반 입씩 번갈아 먹으니 딱 좋다. 그 자리에서 사이좋게 쪽쪽 다 빨아먹었다. 가격도 1.5 CUC으로 무척 저렴한 편. 쿠바에서 먹어본 모든 술 통틀어 짜이는 이게 최고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해맑은 짜이. 칵테일 마시고 더 해맑게 하트 눈 남발하고 다니니까 주인들이 좋아한다. 동양인이라 귀여워 한 걸지도.
여기 동양인 귀여워하는 분 추가요.
와 보래서 갔더니 내 카메라로 자기 좀 찍어달란다. 서울에서 몇 달 살아 봤다는데 제3세계 언어를 써서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나중에 메일로 사진 보내줬다.
오비스포는 관광객 천지고 쿠바노는 피부색이 다양하다. 그래서 어디까지 현지인이고 어디까지 외국인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들은 다 이뻐.
우리 애도 좀 찍어줘요.
짜이! 멈춰
놀랍게도 여기는 약국이다.
박물관인 줄 알았다. 더워 죽겠는데 공간이 너무 멋져서 한참을 있었다. 1, 2층 한쪽 벽면 가득 도자기 같은 약병이 진열돼 있다. 병에서 약 꺼내서 제조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실제로는 서랍에서 꺼내 준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멋있다.
오비스포 거리에서 이런 약국을 두 군데 봤다. 그 외 다른 약국은 평범했다. 알고 보니 여기 존슨 드럭 스토어(Johnson Drug Store)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덥다.
휴대용 선풍기로 정수리 식히는데 누군가 바짝 다가앉는다.
약국 직원.
더워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자기도 선풍기 바람 좀 맞고 싶단다. 귀여운 리액션. 정수리에 한국의 위엄을 발사해줬다. 황홀한 표정으로 여러 번 원더풀이란다. 훗. 폐쇄적인 정책 탓에 공산품 수급이 열악한 나라. 어쩐지 iPhone X와 보조배터리, 나이키 신발에 자꾸 시선이 와 닿더라. 에어팟 끼고 다녔음 더 했겠지. 그러나 확신한다. 쿠바에 진출한다면 애플보단 휴대용 선풍기라고. 어디서 왔냐고?
"Korea. South Korea"
좀 쉬었다 가자
'쉬기 위해' 카페 찾는 것도 귀찮다. 길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그런 사람이 도처에 널렸으니 아무렇지 않다. 쿠바노 흉내 내보기.
시야가 달라지자 보이는 것도 달라졌다. 지나는 사람 하나하나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눈 마주친다. 아! 알았다. 어제부터 받아온 숱한 시선의 이유. 막연히 '동양인이라서'라고 생각했다. 관광객 천지인 오비스포에서도 동양인을 마주친 횟수는 손에 꼽는다. 그마저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이지, 한국인은 한 명도 못 봤다. 작은 한국 여자를 신기해하는 시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앉아 보니 알겠다. 그냥 쳐다본 거다. 지나가는 사람이라서. 앉아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된다. 더우니까 지치고 지치니까 멍 때리면서 사람 구경이나 하는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불편해했네. 스마트폰에 고개 처박고 지내는 한국에선 흔치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었을까.
불편함이 즉각 사라졌다. 서로 구경하는 처지에 뭘.
앉으니까 좋은 점 또 하나. 개의 시선에 가까워진다. 한 입만 좀 주라주.
여기다!
헤밍웨이가 다이키리만 마셨을 리 없다.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에,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따에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술집 홍보 멘트가 명언이라니 어째 민망하지만. 우열을 따지자면 바로 여기,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가 더 유명하다. 이곳의 샛노란 간판이 마그넷으로 제작되어 여기저기서 팔린다. 럼 브랜드인 하바나클럽과 함께 하바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격이다.
골목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다들 모히토 한 잔씩 손에 들었다. 우리도 모히토에서 하바나 좀 마셔볼까나.
맛있다. 진짜 맛있다.
두 잔 먹고 싶다. 세 잔 먹고 싶다. 그러면 나도 <노인과 바다> 같은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한 잔에 5 CUC이면 다른 데보다 두 배나 비싼 가격. 모히토보다 더 맛있는 공연이 있어 다행이었다. 휴. 술로 가산 탕진할 뻔했네.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난리가 났다. 콜라병 같은 언니들이 무대(랄 것도 없지만)를 집어삼키고 있다. 몇 잔 더 마시고 취해 버리면 나도 저렇게 흔들 수 있을까? 그래도 신난다. 그나저나 여기 음향 좋네. 음? 설마. 생목이야...? 저 사람들 성대에 마이크 심은 거 아니지...?
메인 보컬과 함께 연주자 모두가 노래한다. 울림이 대단하다. 귀에 닿는 소리가 가슴팍에서 울린다. 방방방. 좀 비현실적이다.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 갑자기 떼창 화음이 터졌다.
"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내 눈 액체도 같이 터졌다.
설마 한 잔에 취한 거 아니겠지.
내일 또 오자 여긴. 매일 오자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 앞에는 하도 사람이 많으니까 희한한 사람도 많다. '관타나메라' 뽕 맞고 길바닥에서 헤롱 거리는데 웬 할아버지가 방해한다. 만화 캐릭터 같은 차림새. 모든 관광객과 하이파이브하려는 모양이다. "아직 관타나메라 속에 있고 싶은데요" 할 순 없는 노릇. 하. 동심 저격당한 짜이가 나서서 손뼉 마주치고 셀카도 찍어주니 고맙구나.
얼마 후 할아버지는 두 여성에게 살사 스텝을 가르쳤다. 웃겨 정말! 할아버지, 땀을 뻘뻘 흘리는데 재킷을 절대 안 벗는다. 더위 따위에 패션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 가만 지켜보니 교습도 꽤 전문적이다. 할아버지 정체가 뭐세요? 꾼이세요? 아니. 쿠바 사람이면 다 이 정도 추는 건가? 진짜 모를 나랄세..
어디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난다.
까만 얼굴에 붉은 물감, 거렁뱅이 같은 옷과 노란 귀걸이,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단 여자가 괴상한 소리를 빽빽 내지르고 있다. "쿠바! 호!"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머리 아픈 사람은 어느 도시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신경 끄자. 가까이 안 가면 되지. 입에 시가 물고 다니며 관광객들과 사진도 찍는다. 와, 서양인들 용감해.
놀만큼 놀았다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 앞을 벗어나 걷는데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꽃 단 여자 말이다. 혼자 길바닥에 철푸덕 앉아 우리를 향해 "Hola!" 하는 게 아닌가. 피할 수 없게 정통으로 인사받았다. 아씨. "Hola..!"
"Can you take pictures?"
- Yes, Come here!
나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미쳤어? 아씨.
"Oh, Thank you"
왜 그런 상황 있잖은가.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어느 쪽에서든 다음 말을 던져야 자연스러워지는 순간. 2초에서 3초 사이? 그 순간을 못 견디고 무의식이 말을 뱉어 버린 거다. 그녀는 팔을 크게 펼치며 반겼다. 직사광선에 눈이 부셨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다가가는데, 엄청 선한 눈이 거기 있었다. 눈망울이 반짝반짝하다. 표정은 또 왜 이렇게 해맑아. 은근 귀엽게 생겼네. 아픈 사람이...
...... 아니군..요?
너무나 멀쩡한 사람이다.
가방에서 시가를 꺼내더니 같이 입에 물고 찍잔다. 그리고 사진 찍는 내내 연신 요상한 소리를 내지른다. "얖파얖파얖파얖파!" 뭐라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웃기다. 참 간사하지. 아까는 미친 것처럼 들리던 소리가 재밌게 들렸다. 덕분에 행복한 미소가 담겼다.
침 묻히지 않고 살짝 물었던 시가를 돌려주자 가지란다.
"노노, 괜찮아"
- 선물이야
"선물?"
- 응, 너희한테 선물할게
"음.. 얼마야?"
- 아니야 선물이야 이츠 프리
"공짜라고? 그냥 가지라고?"
- 응, 그냥 선물!
곤란했다. 선뜻 받을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선물이라니. 고민 끝에 1 CUC을 꺼내 쥐어줬다. 혼자 오해했던 미안함의 값이라도 치르고 싶었다. 그녀와 작별하고 걸어가며, 우리는 그 요상한 소리를 몇 번이나 따라 했다.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 불현듯, 뒷목이 서늘해졌다.
"헉. 그거"
- 응?
"고도의 상술이었던 거 아냐?"
- 헉
"..."
- ...
"우리... 당한 건가?"
- 그러네... 진짜 시가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치 진짜 시가라면 비쌀 텐데"
'Present, Free'라는 말을 들은 순간에 우리는 정말 순진했다. 어떡하지? 하면서 급히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팁이라 치고 주자, 는 신호가 통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쿠바에도 팁 문화가 있다. 반드시 팁을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서양인 관광객의 매너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우리에게 했던 행동을 서양인들에게도 했다면, 셀카 한 번 찍을 때마다 최소 1 CUC 이상 벌었을 게 분명하다. 괜찮은 장사다.
"그렇다 해도"
- 응, 그래도 즐거웠어!
"응, 기분 나쁘지 않은 상술이다!"
- 귀여운 상술이었다
진짜 괜찮은 장사다.
"얖파얖파얖파얖파!"
- 얖파냔니!
사실 경계심이 쉬이 풀어지지 않는 중이었다. 뇌에서는 엔도르핀이 돌지만 어깨가 뭉쳐 있었다. 비경계로 넘어가는 문턱이 꽤 높았다. 하지만 겪을수록 쿠바는 그럴 필요 없는 나라였다. 상술을 부려도 1 CUC 짜리 귀여움이잖은가. 추억의 값 치곤 저렴하지. 이런 추억이라면 더 사 모아도 좋다. 마신 술은 세 잔뿐인데 날이 뜨거우니 대여섯 잔 마신 듯 후끈해졌다. 구경하는 눈과 마주치면 먼저 "Hola!"를 외쳤다. 길 위에서 몇 번의 Hola가 오갔다. 형체 없는 마음의 문이 스르륵 젖혀졌다.
그즈음이었다. 그 녀석이 다가온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