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나라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는 쿠바의 재즈 그룹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보컬이다. '유일한 여성 멤버'로 활동했다는 소개가 많았는데 이제는 '유일한 생존 멤버'로 소개된다. 그렇다. 다른 멤버들은 죽었다.
그 옛날 서울에 쎄시봉이 있었던 것처럼 하바나에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있었다. 쿠바 음악의 전성기였고, 그곳에서 연주하던 음악가 중 몇은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정권 교체 후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쿠바 음악은 밀려났고 음악가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세월이 흘러 1995년. 미국의 한 프로듀서가 천재 음악가들을 찾아 나섰다. 당대 최고였던 그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녹슬지 않았다. 더욱 농익었다. 그들을 모아 6일 만에 녹음을 마치고 앨범을 발매했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고령의 멤버들은 세계 유수의 공연장을 누볐고 때마다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1999)>로 제작되어 널리, 그리고 오래 퍼지고 있다.
또 세월이 흘렀다. 음악 안에서 아이처럼 놀던 멤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2: 아디오스(The Flowers of Life: Social Club Buena Vista, 2017)>는 그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얼마나 멋진 음악가로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주름과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올해 88세, 1930년생 할머니 보컬 '온도' 씨만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노래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배틀트립 쿠바 편에 '온도' 씨가 등장했다. 영화에서 본 것보다 더 쪼그라든 그녀가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걸을 기운조차 없어 보이는데 공연이 가능할까. 하지만 무대 위 그녀는 기우를 깨며 열창했다. 팔을 천장으로 뻗으며 열렬하게 도입부에 치달았다. 10대 때부터 평생 노래해온 디바답다. TV로만 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생 귀로 듣는다면 오열할 게 분명했다.
가야 한다.
그녀와 동시대에 살고 있을 때, 만나야만 한다.
화/목/토 밤 9시 30분 공연. 같은 방 게스트 수경이 동행하고 싶단다. 각자 여행하고 저녁 7시에 시오마라에서 만나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낮술이 끼어들었다. 4~6시 Happy Hour라며 술을 싸게 파니 응당 마셔줘야지 않겠는가. 술집에서 만난 멕시코 친구가 취해서 상대해 주느라 시간이 더 지체됐다. 시오마라까지 족히 30분. 걸음이 바빠졌다.
예쁜 장면 5개 중 3개는 패스하며 파워 워킹하는데 웬 남자가 인사를?
"Hi!"
- 어, Hi!
하이파이브를 권한다. 엄청 밝게 웃으며, 엄청 반갑게. 그런 거 좋아하는 짜이가 먼저 받아준다. 짜이도 짜이대로 밝게, 반갑게. 녀석이 대뜸 같이 사진 찍잔다. 행동이 너무 뜬금없는데 유쾌했다. 헤벌쭉 웃으며 셀카를 찍었다. '경황이 없어서'라는 말이 이럴 때도 유효한가.
알고 보니 오늘이 되게 특별한 날이라 들떠 있는 것이었다. 행복한 기분을 우리와 나누고 싶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너희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알아?"
- 알지!
"오! 오마라 포르투온도도 알아?"
- 당연히 알지!
"그분이 오늘 이 근처에서 공연해!"
- 어..? 이 근처? 우리 지금 그 공연 보러 가는 길인데?
"저쪽 동네 말하는 거야? 아니야 오늘은 이 동네에서 해!"
- 진짜? 어디서?
"따라와! 빨리 가서 자리 맡아야 돼!"
- 어딘데? 우리 친구 데리고 와야 되는데..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와!"
뭐지? 공연 계획이 바뀐 건가? 스페셜 공연인가? 지인 찬스 공연인가? 하루에 두 탕 뛰시나? 혼란스럽다. 하지만 88세에 하루 두 탕이 가능해? 아닌데. TV에서 본 '온도' 씨라면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데. 이 녀석이 뻥 치는 거 아냐? 모르겠다. 다람쥐처럼 날쌔게 움직이는 녀석에게 맞추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니. 마르고 상체가 긴 족제비에 더 가깝다. 헉헉거리며 거의 뛰듯이 따라갔다. 족제비는 뒤따르는 우리를 향해 몸을 사선으로 돌려 쉬지 않고 말했다. '온도' 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래서 정기 공연이 얼마나 비싼지, 그러니까 오늘 이 기회가 얼마나 특별한 건지.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특별한 기회가 생긴 거냐고? 대체 왜?
싸하다.
그렇게 특별한 공연이라더니 '온도' 씨 이름 한 줄 사진 한 장 없다. 꽤 넓은 펍인데 텅텅 비었다. 얘가 날짜 잘못 안 거 아냐? 할아버지 넷이 악기를 만지고 있다. 무슨 공연이 있긴 있나 본데. 보컬은 어디에? 웨이터와 인사 나누더니 메뉴판을 갖다 달란다. 더우니까 일단 드링크부터 시키라고.
"아니 잠깐만!"
아까부터 계속 말했다. 우리는 시오마라에 가서 친구를 데리고 와야 한다, 공연을 친구와 함께 보기로 약속했다, '온도' 씨가 몇 시에 오는지 알려달라, 친구를 데리고 돌아오겠다... 근데 시간 물어볼 때마다 이 족제비 같은 녀석이 말을 돌리네?
"저기 있는 크루들이 오마라 포르투온도와 함께 공연할 거야"
- But. When. She. Come. Here? 오긴 오는 거야?
짜이가 딱딱 끊어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믿을 만한 걸 보여주겠다며 오버액션한다. 워워. 싯다운.
- 난 널 믿어.. 하지만 친구를 데려와야만 해..
천사가 따로 없네. 짜천사가 족제비를 달래고 있다.
"친구 데리고 오는 사이에 여기 입장 마감해 버릴 거야..."
- 그러니까 언제? 언제 오냐고!
"......"
- 친구 데리고 다시 올게
"마감할 거래두..."
- It's OK.
짜이 말투가 다시 단호해지자 녀석은 풀이 죽었다.
"거기 가면 진짜 비싸..."
- Listen to me. 나 돈 많아. 우린 친구와의 약속이 더 중요해.
돈 많다고 선언해 버리다니! 녀석의 마케팅 포인트가 쓸모 없어졌다.
"돈 많아..?"
- 어!
그때 웨이터가 다가왔다. 주문하겠냐고.
아니. 우리 간다!
녀석이 쫓아 나왔다. 이제야 본심을 말한다. 사실은 오마라 포르투온도 여기에 안 온다고, 형이 아파서 방에 누워 있다고, 뭐든 사다 먹여야 하는데 도와줄 수 없냐고. 배고픈 염소 같은 얼굴로.
- 미안해 우린 더 이상 얘기할 시간이 없어
"알았어 미안해.."
- 아냐
"미안해 정말.."
- 괜찮아 안녕~
다시 시오마라를 향해 파워워킹.
계속 헛웃음이 나왔다. 타이밍도 절묘하지. 마음의 문이 열리자마자 녀석이 치고 들어온 통에 속절없이 당한 거다. 사기라는 걸 진즉에 눈치챘지만 왠지 야박하게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좀 즐겼다. 그래도 '온도' 씨가 오지 않을 거라고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녀석이 마지막에 말한 '미안해'는 진심이었다. 알 수 있다. 몇 번 더 매달렸다면 귀찮아서라도 돈을 줬을 텐데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얼마 주고 올 걸 그랬나. 짜이 생각도 같았다.
"사기를 당했는데 왜 기분이 안 나쁘지?"
- 그치? 귀여웠어
"이렇게 추억 하나 추가"
공연 시간 말곤 아무것도 몰랐다. 어디서 하는지 어떻게 가는지 얼마인지. 누구든 알 만큼 큰 공연일 테니까. 시오마라 직원에게 물으니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공연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노노, 주소만 알려주면 우리가 찾아갈 수 있어!" 했는데 자기가 주소를 모른다고. 걸어가면 어딘지 찾을 수 있단다. 이들의 친절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미안하고 부담돼서 거절...하진 않았다. 가까운 거리니까 데려다준다고 한 거겠지! 그 친절, 고맙게 받겠습니다.
레스토랑 레헨다리오스 델 구아히리또(Legendarios del Guajirito)
시오마라에서 걸어서 15분이나 걸렸다. 이렇게 먼데 선뜻 데려다주겠다고 한 거야? 천사다 천사. 주소 들고 우리끼리 찾아왔더라면 개고생 했을 거다. 이렇다 할 홍보물이나 간판이 보이질 않았다. 문 안 쪽에 놓인 포스터를 발견하기까지 내내 긴가민가했다. 'Buena Vista Social Club'이라는 이름과 '온도' 씨 얼굴을 본 순간. 와, 그 감동은!
하지만 감동의 불씨는 이내 짓밟히고 말았다.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아파서 공연할 수 없대"
...
.....
..
나서서 예약까지 알아봐 주던 시오마라 걸이 말했다. 스페인어로 말하는 레스토랑 직원의 말을 영어로 옮겨준 것이었다. '온도' 씨가 아프다고.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는 다음 말을 쏟아냈다. '온도' 씨는 없지만 대를 잇고 있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공연이 있다고, '온도' 씨는 없지만 그 공연도 멋진데 한번 보겠냐고, 식사와 칵테일까지 포함해서 인당 60 CUC이라고. "잠깐만"
예상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온도' 씨가 반드시 공연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치는 차선책은 좀 거북하다. 게다가 거금 60 CUC을 현금으로 내라니. 고생해준 시오마라 걸에게 미안하지만 다른 차선책을 생각해 보기로 하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오늘만 아픈 거야?"
- 글쎄..
"앞으로 계속 공연할 수 없는 거야?"
- 아마도.. 그녀는 이제 늙어서..
실망보다도 걱정이 앞서 마음이 무거웠다. 부디, 쾌차하시길.
스콜이 지나간 뒤 번개쇼가 펼쳐졌다. 천둥소리 없이 번개만 번쩍번쩍. 까삐똘리오(El Capitolio)와 파세오 데 마르티(Paseo de Marti)를 배경으로, '온도' 씨 공연을 대신하는 선물처럼.
수경이 안내한 재즈클럽에 갔다. 보컬 없이 연주로만 진행되는 공연. 이 클럽, 영리하다. 클라이맥스 때마다 에어컨 온도를 낮춘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이 실제로 추위를 느낄 정도로 소름 끼칠 수가 있느냔 말이다.
얼마 전 재즈 공연을 봤다. 눈을 감고 하바나에 다녀왔다.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2018년 1월 새 솔로 앨범을 냈다. 무려 25곡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