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데로 가는 길
우리를 태우고 바라데로까지 두 시간 반을 달려가 줄 택시는 올드카 중에서도 오올드카. 아바나에 며칠 있어 보니 알겠다. 올드카라고 다 같은 올드카가 아니다. 급이 나뉜다. 그에 따라 택시 요금도 다르다. 바라데로까지 40쿡(인당 20)인 이유가 있었다. 승차 환경 따질 처지는 아니다만.
장거리를 이동하는 쿠바 올드카 택시에 대해 들은 바 있다. 길 위에서 타이어에 펑크가 났는데, 다른 차에서 바퀴 하나를 떼다가 바꿔 끼더란다. 스페어 타이어도 아니고 멀쩡히 달려 있는 네 바퀴 중 하나를, 매우 익숙하게. 우리 차는 출발할 때 시동이 안 걸려서 밀어 밀어 겨우 출발했지만 가다가 퍼지진 않았으니 상황이 좀 나았다. 바라데로까지 밀어서 갈까 봐 아주 잠시 당황했지만 웃겨 버렸다. (영상 참고)
또 하나는, 기사가 친구와 동석한다는 것이다. 건장한 사내 둘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서워서 왜 같이 타야 되냐 물으니 "돌아올 때 심심하잖아"라고 했다고. 그것도 며칠 관찰한 결과 이해됐다. 쿠바노는 말이 많다. 수다스럽다는 느낌보단 그냥 심심한 걸 못 견뎌하는 것 같다. 우리 택시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수석에 기사 아들내미가 탔다.
이 녀석, 잘 생겼다. 날카로운 눈매며 허스키한 보이스며 나이는 어려도 영락없는 남자다. 그런데 훔치고 싶은 속눈썹을 가졌다. 옆선은 또 어찌나 고운지. 고개 돌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너무 잘 생겨서.
에어컨도 라디오도 없는 차.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부자의 낮은 음성만 오가는 통에 깜빡 잠이 들었다. 아들내미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귀에 바짝 대고 들으며 이따금 어깨를 흥얼거린다. 우리에게 방해될까 봐 일부러 조용히 튼 것 같다. 창문으로 밀려오는 바람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소리인데, 가만히 들어보니 라틴계 느낌의 힙합이다. 멜로디가 은근히 세련됐다. 적적했는데 잘 됐다.
"볼륨 업. 같이 듣자"
샤이한 친구다.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어리바리하더니 이내 말귀를 알아듣고 볼륨을 높인다. 소심하게 찔끔찔끔 올리길래 'max'를 요청하고 나서야 차 안에 음악 같은 게 퍼진다. 녀석은 스피커 부분이 위를 향하게 잡고는 왼쪽 어깨춤에 고정시켰다. 뒷좌석에 앉은 우리를 위한 배려다. 쿠바노의 친절이란 외모며 행동이며 어쩜 이리도 일관적인지.
아빠 기사가 목적지 호텔 이름을 묻는다.
아까 물어봤잖아? 호텔 이름까진 우리도 몰라. '바라데로에 있는 올인클루시브 호텔 중 하나'에 갈 생각이었단 말야. 아무 데나 일단 호텔 많은 동네로 데려다 달라고 하곤 달리는 중이었다. 의사 전달이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음. 그래. 생각해 보니 우리가 생각이 너무 없었다. 아무 호텔이나 이름을 알려줘야 될 것 같아 맵스미를 열었다. 처음이었다. 바라데로 지도를 본 건.
왜였을까. 조그만 해변 마을일 거라 상상했다. 근거 없는 상상과 달리 커다란 반도에 떡하니 Varadero라고 쓰여 있다. '호텔 많은 동네'랄 것 없이 커다란 호텔이 여기저기 분포돼 있다. 기사가 물어볼 만했다. 딱 봐도 걸어 다니며 탐문할 동네는 아닌 듯싶다. 그런데 '아무 호텔'도 고르기가 쉽지 않다. 맵스미가 하도 후져서, 스팟마다 어디는 '호텔' 어디는 '영빈관'이라며 표기법이 대중없고, 별점도 있다가 없다가, 호텔 이름도 영어였다가 스페인어였다가 엉망진창이다. 인터넷은 당연히 안돼, 아빠 기사는 아는 호텔 없대, 의지할 데라곤 맵스미 밖에 없는 상황. 눈치껏 찍는 수밖에 없다. 보니까 반도 깊숙이 위치한 호텔일수록 대지 면적이 크다. 비싼 호텔 냄새를 피해 슬쩍 변두리에 있는 호텔 중 맘에 드는 이름 하나를 골랐다.
'영빈관'이라고 표기돼 있던 그곳은 식당이었다.
내려서 알았다. 영빈관이 뭐냐는 짜이 질문에 '맞이할 영, 손님 빈'을 쓸 테니 호텔이랑 똑같은 거라고 허세 부리면서 고른 곳인데, 파리 날리는 변두리 식당에서 멘붕을 맞이한 손님 꼴이 됐다. 덥다. 녹아내린 선크림마저 증발하는 태양 아래서 물부터 들이켠다. 1쿡 주고 산 1.5리터 생수를 각자 하나씩 소중하게 끌어안고 왔다. 이 골목 저 골목 다녀봐도 이 동네엔 호텔이 있을 리 만무하다. 흙길 위에서 캐리어를 달달달 끌었다. 짜이는 봇짐꾼처럼 커다란 백팩을 멨다. 낮고 아기자기한 집과 햇빛에 반짝이는 이름 모를 꽃이 예쁜 동네, 고 나발이고 덥다. 사람도 차도 안 다니는 고요한 동네. 도로까지 나가려면 15분을 걸어야 한다. 도로에 나가 택시를 만난다 해도 어디로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제야 알았다. 아까 택시 기사가 내려서는 그 '식당' 안까지 바래다주려고 했던 게, 같이 가서 우리가 원한 호텔이 맞는지 확인해 주려고 했던 거다. 거기가 아니라면 다른 데를 찾아가 주려고 했던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츠 오케" 하면서 보내 버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괜찮냐 묻는데 정말 괜찮다고 하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아! 머리가 둘인데 이렇게 멍청해서야.. 몸아 미안해.. 니가 고생이 많다..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물어보기로 했다. 영양가 없는 꼬마들 필터하고 드디어 만난 첫 번째 어른. 차 안에 있는 두 남자는 다행히 영어가 능숙했다. 이들을 놓치면 언제 또 영어 소통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뽕을 뽑아야 한다. 이 동네에 올인클루시브 호텔이 있냐? - 없다. 그럼 올인클루시브 호텔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냐? - 택시 타고 시내로 가야 된다. (지도를 보여주며) 시내가 어디냐? - 여기 이 쪽이다. 이 길로 나가면 택시가 있냐? - 택시는 장담할 수 없고 버스가 있긴 하다. 어떤 버스를 타야 되냐? - 어쩌구저쩌구한 버스를 타면 된다. 그게 언제 오냐? - 가끔 온다.
하. 들으면 들을수록 기운 빠지는 대답들.
"그냥 너네가 데려다주면 안 돼?"
이 차는 택시가 아니라서 안 된단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은 남자의 차가 택시라고..? "우리를 태워줘!" 기뻐하는 우리와 달리 남자는 차분하다. 차에서 내려 함께 지도를 보며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여기서 시내까지는 상당히 멀어. 그래서 15쿡을 내야 돼"
- 말도 안 돼! 우린 아바나에서 여기까지 40쿡에 왔어
"아마 너희는 후진 차를 타고 왔을 거야. 내 차는 좋은 차야"
- 그래도 15쿡은 너무 비싸. 우린 가난하단 말야
"그럼 저기 도로로 나가서 다른 택시와 흥정해 보는 게 어때? 운 좋으면 10쿡에도 갈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로컬버스를 타 봐. 버스는 정말 싸"
당황했다. '내 차는 비싸서 너희에게 적합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알려줄게' 하는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차라리 흥정을 해줘... 너무나 자상해서 고맙지만, 죽을 맛이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거나 또 다른 택시를 찾아 흥정하는 것. 선택지는 두 가지인데 그마저도 한참을 걸어가야 시도할 수 있다. 5쿡 아끼려고 그 고생을 해야 되나. 응, 해야 돼. 우린 가난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모습을 봐서였을까. 그가 '에라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10쿡을 수락했다. 와우! 리얼리? 땡큐! 유아 마이 에인절!
"와.. 비싸게 굴 만했네"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내부까지 멋지게 튜닝한 올드카는 처음 타 본다. 시동도 잘 걸린다. 나중에 알았다. 이런 차로 그 거리를 그 값에 간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가 알려준 것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내심 그 자상함이 고도의 흥정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는데. 미안해요.
'아멧'이라는 이 남자, 스윗하기까지 하다.
한국인을 처음 만난다며 좋아하는 모습이 호들갑스럽지 않아 좋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구분하기 어려운데 글자는 보면 알 수 있다고. 한글에는 동그라미가 많이 들어간다고. 외국인들이 한글을 예뻐라 한다더니, 같은 맥락인가 보다. 보답하는 느낌으로 우리도 쿠바 와서 배운 스페인어를 되는대로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떼 끼에로 꼬메르 뚜스 라비오스 베사르(te quiero comer tus labios besar)"를 말했을 때 그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해석하면 '너를 좋아해서 입술을 먹어 버리고 싶다'. 술집에서 자주 들리던 노래 가사였다.
기쁨도 잠시. 만실이란다.
아니. 바라데로에 호텔이 그렇게 많은데, 말이 돼? 왜 하필 여기가 만실이야? 어이가 없어서 욕도 안 나오고 더워 죽겠다. 도착했을 때부터 친절을 보이던 로비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호텔이 어디냐, 우린 올인클루시브에 가야 한다, 꼭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곳이어야 한다면서. 또 나가서 방황할 생각하면 죽을 맛이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제시한 답은 의외로 가까운데 있었다. 로비 한 켠에서 테이블 하나 놓고 운영 중인 여행사 직원에게로 가 우리를 소개했다. 그녀가 해결해 줄 거라고. 상담 비용을 걱정하니 무료라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말하면 적당한 호텔을 찾아 예약해 주는 프로세스다. 세상에 이런 엔젤들이 있다니! 호텔 비용에 수수료 명목의 금액이 추가될 순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고 보니 아바나에서 수경이 알려준 적 있다. 아바나에서도 큰 호텔에 가면 여행사 직원이 있는데, 거기서 바라데로 호텔을 미리 예약하고 가면 편리하다고. 왜 모든 배려들이 뒤늦게 떠오르는지...
빅뱅 팬이라는 로비 엔젤과 대화하는 사이, 여행사 엔젤은 근처 호텔을 신중히 선별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곳도 만실이란다. 아무래도 시내라서 그런가? 다른 호텔도, 또 다른 호텔도, 더 멀리에 있는 호텔도 계속해서 만실이란다. 엔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날은 덥고 로비는 더 덥다. 30분째. 바라데로에 있는 모든 호텔에 연락할 기세다. 힘내 엔젤! 손풍기를 쐬어주며 응원한 끝에 드디어! 우리를 받아줄 호텔이 나타났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연거푸 "땡큐"했다. 지도를 보여주며 호텔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10~15쿡 정도 내고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인데 괜찮냐며 걱정해준다. 우린 괜찮아 엔젤. 고마워 엔젤. 사랑해 엔젤.
호텔 Playa de oro에 도착했다. 무사히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체크인하자마자 우리는 서로 수고했다며 자축 세리머니를 했다. 추울 정도로 빵빵한 에어컨, 어딘가 촌스러운 푸른 벽지와 두 개의 베드, 커버 달린 변기와 두루마리 화장지(쿠바 화장실에서 귀한 두 가지임), 엠넷 같은 음악 방송이 나오는 텔레비전. 그거면 됐다.
샤워를 하고 디너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갔다. 시오마라에서 조식 먹은 후론 내내 공복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온갖 종류의 고기와 생선과 피자, 파스타, 빵, 채소, 정체불명의 요리들이 우리를 향해 웃고 있다. 모두 공짜다. 와인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어제 먹은 랑고스타 때문에 장염이 왔지만, 장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냥 먹고 아프련다. 우린 정말로 실-컷 먹었다. 해 떠 있을 때 들어와서 까만 밤이 돼서야 식사를 마쳤다. 앞 옆 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뀌다가 자리가 비었다. 배만 안 아팠더라면 더 먹었을 수 있었는데. 좀 아쉽지만 짜이가 배로 먹어줬으니 괜찮다. 쿠바에 온 뒤로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제 무제한 칵테일을 즐기러 가 볼까? 배 두드리며 나가는데 웨이터 한 명이 우리를 막아섰다.
"너희가 많이 먹어서 내가 서비스를 많이 해줘야 했어. 그러니까 팁 줘야 돼"
- 어...? 미.. 미안해..
"내가 너희 그릇을 몇 번이나 치웠어"
- 어.. 근데 우리 돈 안 가지고 왔어.. 내일 다시 오니까 내일 줄게 (땀)
"내일 나 오프야"
- 그.. 그럼.. 몇 시까지 일해? 방에 가서 갖다 줄게..
팁 요구하는 곳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나서서 팁 내놓으라고 했을까. 역시, 고생 고생해서 올인클루시브 호텔 찾아온 보람이 있다. 짜이가 소중하게 챙겨온 장염약을 내어줬다. 내일은 더 많이 먹기로 한다.
그날 밤, 짜이와 마주 누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거의 반년 만이다. 짜이하고만 나눌 수 있는 대화, 짜이여야 풀리는 대화, 짜이도 나여야 하는 대화가 있다. 그런데 짜이가 토론토로 떠난 후론 얼굴을 보지 못했고, 여행 중에는 내내 긴장 상태라 대화 같은 걸 할 수 없었다. 각자 한국에서, 캐나다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고민이 가득했다. 그걸 쿠바에 가져와 다이키리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자니 픽션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고,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없는 기분. 대화는 밤을 따라 웅얼웅얼 대며 소멸했다.
우리 진짜 고생했다면서.
내일부터는 다시 돈 걱정을 하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