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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Aug 07. 2018

돈을 보냈는데 왜 받지를 못하니

예약/결제 체험기


바라데로는 그냥 '호텔'이다.

호텔이거나 호텔 앞 해변, 그게 끝이다. 호텔 수영장 물에서 놀거나 호텔 앞 바닷가 물에서 놀거나, 그걸 하러 가는 거다. 자유이용권 같은 팔찌만 차고 있으면 식당에서 밥을, 바에서 술을, 카페에서 커피를 공짜로 준다. 수영복 차림으로 하루 종일 놀기에 딱 좋은, 그런 곳이다. 대부분 캐나다, 멕시코, 프랑스에서 온 휴양객인데 가족 단위 손님과 노인이 많다. 우리처럼 젊은이 둘이 온 경우는 '거의' 없고, 동양인은 '아예' 없다. 한국 블로그에 리뷰 한 줄 없는 호텔이니 한국인 없는 거야 그렇다 치고, 한반도 옆 동네 밑 동네 건너 동네도 제로. 이곳에서 우리는 완전한 이방인이다. 하지만 피차 여행자 입장이기 때문일까, 어떤 면에선 아바나보다 심적으로 편안하다. 간혹 술 취한 놈팽이들만 조심하면 된다.


쉬러 온 그들과 달리 그저 '먹기 위해' 머무는 유일한 동양인 둘은 꼭두 아침부터 바쁘다. 기상하자마자 모자만 눌러쓰고 식당으로 직진한다. 브렉퍼스트 메뉴 하나하나와 굿모닝 인사하다가 달걀 프라이 앞에 멈췄다. 햄, 치즈, 채소 등 원하는 재료를 고르면 셰프가 달걀에 풀어 프라이를 만들어 준다. 볼에 가득 담긴 하얀 달걀이 탐스럽다. 눈 앞에서 쉐킷쉐킷하고 치이이이익 부쳐지는 모습을 보니 너무 먹고 싶다. 두 개 먹고 싶다. 하지만 나의 장염은 도무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짜이도 미세하게 장염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트러블러의 직감상 지금 달걀은 위험하다.


"두 개 먹자"

짜이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나만 먹자"

어차피 탈은 이미 났잖아? 그래도 무서우니까, 하나를 맛있게 먹어 버리자.



식사 중 번갈아 화장실에 갔다. 내가 생각해도 미련하다. 죽을 걸 알고도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아플 걸 알지만 먹는 것마저 포기하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기에 뛰어드는 거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바라데로에 왔다. 솔직히 호텔에만 짱 박혀서 휴식하는 여행,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재미떼가리도 없다. 솔직히 밥맛도 그저 그렇다. 처음엔 굶주려서 휘둥그레졌지만 뷔페가 맛있어 봤자 뷔페지. 우리나라 결혼식장 뷔페만도 못하다. 기본적으로 질보다 양이다. 평소 같았다면 내 돈 내고 안 온다. 하지만 지금은 불평할 수 없으므로 좋은 점만 찾자. 이러나 저러나 Not Bad.

오늘따라 라떼가 엄청 땡긴다. 부족한 식사를 우유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라떼까지 먹었다간 최소 화장실에서 살거나 최악 화장실에서 죽을 것 같다. 블랙커피로 타협했다. 제법 큰 머신이 있길래 살짝 기대를 섞어. 요란한 그라인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바리스타의 리드미컬한 동작을 좋아한다. 서울에서 매일 보던 장면이 아른거렸다. 힘주어 탬핑하고 포터필터를 뒤집어 커피가루를 툭툭 쳐내는, 한번 더 탬핑하고 머신에 끼우고 추출 버튼을 누르는, 졸졸 흘러나오는 에스프레소를 바라보는 일련의 과정이 음악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국의 바리스타는 어떨까?

탬퍼 대신 숟가락이 들렸다. 주문받자마자 커다란 통에 손을 담그더니 숟가락 가득 커피가루를 퍼낸다. 그걸 포터필터에 넣고 숟가락 밑동으로 두어 번 누른다. 꾹꾹 아니고 국국. 그리고 곧장 머신에 장착.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촉촉한 감성에 숟가락 드립이라니. 서울 가고 싶다. 그러나 저러나 커피 맛은 So So.






Mission, ( )possible


이제부턴 중요한 미션을 치러야 한다. 수중에 남은 현금이 30만 원도 안 된다. 것도 환전해야 쓸 수 있는 캐나다 달러까지 포함한 계산. 내일 당장 아바나로 돌아가야 하는데, 손가락 빨게 생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다행히도 밤새 묘안이 떠올랐다. 이 호텔의 유일한 와이파이 스팟인 로비에 자리 잡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와이파이 님에게 접속한다.



미션 1.

에어비앤비로 아바나 숙소 예약하기

이 생각을 왜 미처 못했을까! 에어비앤비로 예약하면 미리 등록해둔 신용카드로 결제되니까 현금이 필요 없다. 말레꼰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고층 주택, 앤티크한 정원이 딸린 대저택, 신식 아파트 등 멋진 숙소 천지. 개중 마음에 쏙 드는 숙소를 골랐다. 어라? 그런데 인터넷이 느려서인지 어째 예약 단계로 넘어가지질 않는다. 몇 번 시도하다가 안 되겠어서 호스트 안토니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집이 마음에 드는데 예약이 안돼서 연락했어. 내일 묵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혹시 거기에 가서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지 알려줄래?' 기똥차게 빠른 답장이 왔다. 예약은 가능하지만 안타깝게도 현금 결제밖에 안 된다는 내용. 물어볼 때부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다. 카드 리더기가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다른 집은 싫다. 안토니오의 집이 너무 맘에 들어 버려서 다른 집은 눈에 안 들어온다. 일단 주소를 받아뒀다. '미션 2'에 성공해서 꼭 가고 말 테다.


미션 2.

캐나다 사는 친구에게 돈 빌리기

이 생각을 왜 미처 못했을까! ATM 인출 가능한 카드는 캐나다 계좌에 연결된 짜이 카드뿐. 근데 계좌에 돈이 없다. 한국 계좌에서 캐나다 계좌로 송금하면 3일이 걸린단다. 그렇다면! 캐나다 계좌끼리 송금하면 될 일 아닌가. 짜이 친구들은 가난한 외노자 또는 학생이니 즉시 제외. 밴쿠버에 사는 죽마고우 희상에게 연락했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짜이 계좌로 500CAD을 송금해 달라고.


[ㅇㅋ 이메일 주소랑 이름, 폰번호]


역시. 친구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름과 폰번호부터 보낸다. 이메일 주소는 뭘 보내야 할지 몰라 잠시 혼란스럽다. 아무거나 말하면 되나? 계좌 개설할 때 입력한 주소를 말해야 되나? 이 세 가지를 왜 물어본 거지? 금세 또 톡이 온다.


[보냈엉. 비밀 질문에 답은 toronto]


자, 잠깐만. 비밀 질문은 뭐고, 이메일 주소 안 가르쳐줬는데도 보낸 거야? 계좌 번호 같은 건 필요 없어? 캐나다 송금 시스템을 알 턱 없는 나는 어리둥절하다. 당연히 뭐라도 알 줄 알았던 짜이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한국에서 오는 송금만 받아봤지, 아직 캐나다 계좌끼리 돈 주고받아본 적이 없단다. 말이야 방구야. "더치페이 안 해?" 더치 해도 송금할 일이 없단다. 1테이블 N결제 문화. 셋이서 300달러 나왔으면 카운터에서 100달러씩 세 번 결제해준다. 우리나라 같았음 자영업자 기암 할 방식이다. 어쨌든, 희상이 알려준 캐나다 송금 시스템은 이렇다. 보내는 이가 받는 이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or 폰번호'를 입력하고 '답'을 설정해서 보내면 가상의 공간에 돈이 묶인다. 그리고 이메일 or 문자로 링크가 전송된다. 그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받을 계좌와 '답'을 입력하면 받기 완료. 신박하다. "토스 같은 거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짜이 폰으로 문자를 받아야 하는데, 유심칩을 잃어버렸네? 참도 짜이답다. 있었어도 로밍을 안 해서 문자 수신이 안 됐을 것 같지만. "이메일 주소로 다시 보내달라고 하자!" 아무 이메일이나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짜이가 아이디/비번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메일 계정은 하나뿐이다. 하나라도 기억하는 게 어디야. 희상에게 아까 보낸 건 취소하고 이메일 주소로 다시 한번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엔 제발..'


받은 편지함을 새로고침 하고 목록 맨 위에 'HEE SANG KIM'이 보였을 때, 우리는 환호했다.

그리고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조용해야 했다.


이메일에서 노란 버튼을 누르면 두 번째 화면으로 이동, 스크롤 내리면 세 번째 이미지와 같이 보인다


받을 계좌를 입력하려면 은행부터 선택하는 거겠지? 여러 은행 중 'TD bank' 로고를 누른다. TD bank 사이트로 이동하는 듯하더니 서버에 접근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응? 뭐지? 전 화면으로 돌아간다. 다시 TD를 누른다. 또 같은 메시지가 나온다. 다시 전 화면으로 돌아간다. 온갖 다른 걸 눌러본다. 뭘 해도 계좌 입력하라는 단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희상에게 사진과 영상을 보내본다. 동선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TD를 누르면 계좌 입력 단계가 나와야 하는 거라고.


Access Denied

You don't have permission to access "http://esecure.tdbank.com/net/mobiletransfer?" on this server.

그런데 이런 메시지가 나오는 거다.


[티디뱅크에서 쿠바를 블록해 놨나 봐. 아니면 반대로, 쿠바에서 다른 나라 은행을 막아놨거나]


에이 설마.

불안정한 인터넷 환경이 의심스러웠다. TD bank 서버 상태도 의심된다. 다른 루트를 시도할 순 없나? 화면에 'OR'을 기준으로 위아래가 나뉜 걸 보니 루트가 두 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시도했던 TD bank 사이트로 이동하는 건 은행+계좌번호로 받는 기본 루트, 그 아래 뭔가 셀렉트 하는 영역에서는 카드사+카드번호 정보를 기준으로 처리하는 우회 루트 같다. UI/UX 일하며 벌어먹은 통빡이 이럴 때 유용하구나. 그런데 셀렉트 박스마다 보기 값이 엄청 많아서 뭘 선택해야 될지 모르겠다. 다 영어다. 짜이가 룸에 가서 카드를 가지고 왔다. 카드에 적힌 글자와 일치하는 값을 찾아보자고.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봐도 그런 건 없다.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아무거나 막 눌러봐도 안 통한다. IT 경력이 둘이 합쳐 15년인데.. 개발자가 아니라서 무쓸모인가. 하. 화도 안 난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잘못한 걸까..? 돈을 보냈는데 왜 받지를 못하니...


안 되겠다.

차선책을 이행하자. 카카오뱅크로 해외 송금하면 3일 걸릴 게 하루 만에 오기도 하더란다. 물론 짜이 말이라 100% 신뢰할 순 없다. 말하는 짜이도 불안해 보인다. 쫄지 마! 뭐라도 해보자. 내 계좌에서 송금하는 거니까 누구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앱 로그인 인증이 풀려 있네? 다시 로그인하려면 휴대폰으로 본인확인을 해야 되는데, 문자 메시지로 인증 번호를 발송하는 방식이다. 그렇다. 로밍하지 않았으므로 불가능. 젠장.


이대로 굴복할 수 없다.

차차선책을 이행하자. 죽마고우 민주에게 연락했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카카오뱅크를 이용해 짜이 계좌로 500CAD를 송금해 달라고. 한국 시간 새벽 2시. 다행히 민주가 깨어 있다.


[ㅋㅋㅋ 알았옹. 근데 카카오뱅크 계좌가 없어도 보낼 수 있낭?]

[만들어야 돼]


그 새벽에 카카오뱅크 가입하고 계좌 개설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민주는 해외송금 첫 경험, 나도 해외송금시켜보는 것 처음, 짜이가 준 계좌 정보는 온통 영어 자료. 더듬거리며 한 시간이 지났다. 민주가 송금 완료 화면 스크린샷을 보내줬을 때, 우리는 환호했다. 카톡창에 눈물이 넘쳤다. 이건 전적으로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준 민주의 선방이다.


[어여 나가 놀아~ 재밌게들 ㅋㅋ 나는 잘게]

역시. 친구 좋은 게 좋은 거다. 잘 자. 나의 수호천사.






Another way that you can try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라니?

안토니오에게 새 메시지가 왔다. 그가 말한 방법은 놀라웠다. 쿠바 내에서는 결제를 하지 못하도록 미국에서 막아두었기 때문에 예약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거라고, VPN을 이용하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거였다.


"대애박"

아까 자세히 보지 않고 스킵해 버린 에어비앤비 화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예약 단계를 다시 시도해 봤다.


회원님의 위치가 쿠바(으)로 감지되었습니다.

에어비앤비는 이 숙소에 예약 서비스를 제공할 권한이 없습니다.


와우, 정말이다. 여기가 쿠바라서 안 되는 거였다. TD bank 사이트에 접속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설마가 진짜였다.


"VPN이 뭐야?"

흥분한 나와 달리 어리둥절한 짜이. 우리말로 하면 '가상 사설망'인데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IP를 우회해 접속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실제로는 쿠바에 있지만 다른 나라 IP로 우회해서 에어비앤비에 접속하면 카드 결제를 할 수 있다!는 것. 개념은 알지만 나도 어떻게 써먹는지는 잘 모른다. 내일 안토니오네 가서 물어보자.


[안토니오, 너는 최고의 호스트야!]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갑자기 배도 안 아파진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후련할 수가!

시간을 보니 벌써 런치타임. 일어나서 한 일이라곤 밥 먹기, 폰 쳐다보기, 화장실 들락거리기 뿐이다. 런치는 특별히 야외 식당에 차려진단다. 신난다. 이제 우리도 좀 쉬어보자. 수영하러 갈까?






사고는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신이 있다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꼴을 못 보겠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눈치없게 해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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