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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Aug 14. 2018

사고가 뭉치는 카리브해

쿠바는 잘못이 없소


"앜! 카메라가 꺼져 있었어!"

- 배터리 나갔어?

"어.. 영상 찍고 있었는데.. 저장됐을까? 아씨.."




카리브해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변은 여유롭다 못해 평온했다. 변칙적으로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물결 위에서 조각조각 흔들리는 태양, 그늘에 앉아 책 읽는 우아한 할머니,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할머니에게 간간히 손 흔드는 몸짱 할아버지. 우리도 평온한 공기의 일부인 양, 선베드에 젖은 몸을 뉘이고 눈을 붙였다. 처지를 생각하면 사치 같아도 이 아름다운 시간을 놓쳐 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사실 달리 할 일도 없다. 파라솔 그림자를 따라 베드 위치를 두어 번 움직일 즈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서더니 한산해졌다. 해 떨어지는 거 보려고 기다리길 잘했다. 어느새 해변이 다 내 것 같아졌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해서 좋은 거겠지.



"헉. 내 폰도 꺼진 거 아냐?"


짜이는 카메라 비디오 모드로, 나는 아이폰 타임랩스 모드로 석양을 담고 있었다. 뚝, 하고 떨어질 줄 알았던 태양이 생각보다 처언천히 내려가는 중이었다. 조금씩 지루해졌지만 작품에 클라이맥스가 담기지 않았으니 포기할 수 없다. 그러던 중 짜이 카메라 전원이 꺼진 걸 발견한 것이다. 내 폰도 위험하다. 만약 꺼졌다면 보조배터리로 충전하면서 클라이맥스 장면만이라도 다시 촬영해야 한다. 석양 촬영은 타이밍 싸움이다.

선베드 위에 고정해둔 휴대폰을 향해 잽싸게, 그러나 살금살금 몸을 옮겼다. 찰나에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선베드 측면으로 가자. 폰이 넘어지지 않도록,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여차하면 전원 안 꺼지고 멀쩡히 촬영 중인 작품을 망칠 수도 있다. 쿠바까지 와서 카리브해 찍을 일이 어디 흔한가. 속초에서 동해 찍는 거랑은 다르잖은가.



그때 사달이 났다


엄청난 충격과 동시에 비명을 지른 것도 같다. 온몸이 굳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억이 끊긴 자리에 세상의 시계가 멈춘 듯했던 느낌만 남겨졌다. 초능력자가 나타나 일시정지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기절을 한 건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뇌 회로가 가동되었을 때 캄캄한 눈 앞에 아스라한 빛이 띄엄띄엄 떠다니는 게 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거구나'

얼굴에 모든 주름이 눈두덩이로 쏠리고도 남을 만큼, 질끈 감은 눈을 차마 뜰 수 없었다.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선베드! 그래, 선베드 옆으로 가려고 발을 뻗었어'

선베드 다리에 부딪친 모양이다. 그 충격으로 지금 주저앉아 있는 거다. 어딜 다친 거지? 발인가? 발.. 왼 발... 아프다... 그제야 나의 왼 손이 왼 발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세게 찧었길래, 이 정도로 두서없이 아픈 거지? 뼈가 부러진 건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맨발이니 발 전체가 충격을 흡수했을 터. 테이블 모서리에 내성발톱 찍혔을 때보다 스무 배는 더 분하다. 천, 천히 눈을 떴다. 심호흡을 하고 더 처언, 천히 발을 감싸고 있던 손을 뗐다.

새끼발가락과 네 번째 발가락, 그 언저리까지 붉다. 육안으로 봐선 정확히 어디를 부딪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고통도 전방위적이다. 만져서 찾아볼 용기는 내기도 싫거니와, 이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안 궁금하련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나를 발견한 짜이가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더니 사색이 됐다.


"부러졌던 데를 또 부딪친 거야?????”






3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짜이와 같은 회사에 다니며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야근하면 술이 그렇게 땡긴다. 그날도 불금에 야근하고 회사 욕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아사히 생맥주가 맛있는 단골 이자카야였다. 혼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오른쪽 발을 접질렸다. 왜, 걷다가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멀쩡히 걷다가 삐끗하는. 술이 되긴 했지만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고 그야말로 '삐끗' 했다. 그래도 좀 아프긴 해서 빈 의자에 발 올려놓고 계속 술을 마셨다. 근데 발이 점점 아파오는 거다. 양말을 벗고 봤더니 발등이 새빨개져서는 퉁퉁 붇고 있었다. 그즈음엔 술이 더 올라서 "와 신기하닼ㅋㅋㅋ" 하면서 계속 마시다가 부축을 받으며 귀가 택시에 올랐다. 다음 날 엑스레이 결과는 어이에 밥을 말아먹을 지경이었다. 새끼발가락 부근 발등뼈가 댕강 부러져 있는 게 아닌가. 금이 간 것도 아니고, 사선으로 절단이 났다.


"네? 골절이요? 저 그냥 접질린 건데요?"


사람 좋은 의사샘이 허허 웃으며 재수 없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젊은 사람이니 금방 붙을 거라고 하는데 그냥 그럴 수도 있겠거니 받아들이라고요? 인과 관계 불일치한 상황을 납득할 만한 사유가 필요했다. 골밀도 검사를 해달라고 했다. '굳이' 할 필요 없다며 확신에 찼던 의사샘은 검사 결과가 나오자 말이 느려졌다.


"골다공증까진 아닌데.. 위험에 가깝네요.. 젊은 사람이 왜.."


야근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대표쉐키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람이 햇빛을 쬐고 비타민D를 충분히 공급받아야 칼슘이 돈다는데, 밤낮없이 일만 했으니 통뼈 유전자도 별 수 없었던 거다. 간간히 '에이 설마'하는 사람들이 다 미웠다. 개같이 일하는 패턴을 2년 넘게 겪어낸 내 몸이 증거다, 이노마!

한 달이면 붙을 거라던 의사샘 말씀과 달리 그 무거운 통깁스를 두 달이나 장착해야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뼈에서 인이 나와야 붙는데.. 안 나오네.. 좀 더 봅시다"라는 말을 듣다가 마지막에는 뼈가 다 붙진 않았지만 깁스를 더 했다간 발목이 문제될 테니 푸르자고 했다. 먼 동네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는 병원의 실력 좋은 원장 샘이었는데, 그에게도 내 뼈는 난제였나 보다. 그 후로도 물리치료를 두 달, 절뚝거리며 다니느라 불균형해진 척추를 바로 잡느라 운동을 또 두 달, 언 반년을 환자로 지내야 했다. 재수 없게 접질렸을 뿐인데 말이다.


깁스하고 목발 짚고 출근했던 첫날, 모두가 놀란 표정과 함께 박장대소를 할 때 짜이는 울었다. 나조차도 어이없어서 웃는데 짜이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안타까워했다. 웃픈 거였겠지만. 같이 하하호호 술 먹던 사람이 절름발이가 되어 나타난 게 충격이었나 보다. 수개월 고생하는 걸 지켜보고 재활 운동을 같이 하고 치료 후 첫 여행까지 함께 한 짜이였다.


"왜 자꾸 나랑 있을 때 그러는 거야!"


그때의 설움 같은 게 떠올랐는지, 짜이는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3년 전에 다친 건 오른 발이고, 이번엔 왼 발이라고 했더니 한숨 돌린다. 뼈에 금이 갔거나 최소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고 하자 다시 글썽거렸다. 또 뼈 부러진 거면 어떡하냐고. 그럴 때 짜이는 꼭 애기같다.


"내가 부러져 봐서 아는데, 그 정도 아픔은 아냐^^"


자랑이다. 하지만 정말 골절됐을 때만큼의 아픔은 아니다. 그땐 정말 가만있어도 다리에 전기가 찌릿찌릿했다. 새끼발가락을 부딪쳤는지, 뚱뚱하게 붇긴 했지만 왠지 금방 나을 것 같은 아픔이다. 급한 대로 짜이가 챙겨 온 파스를 붙였다. 동전 크기의 일본제 파스인데, 엄청 강력해서 붙이자마자 다 나은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신박한 걸 챙겨 왔대?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다치기 전, 행복했지


쿠바 여행 5일 차. 남은 날은 3일.

파스 때문인가,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깐 진짜 십 년 감수했다. 다친 부위를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절뚝거려야 하지만 이 정도면 걸을 만하다.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지금 문제는 발이 아니라 돈이다.


내일의 미션을 체크해 보자.

1) 민주 돈 들어왔나 확인하기

2) 조식 두둑이 챙겨 먹은 후에 체크아웃하기

3) 바라데로 시내 나가서 환전하기

4) 아바나행 차편 구하기

5) 병원 가기






아침. 민주가 송금해준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우리는 멘붕에 빠졌다. 주말이라는 걸 간과했다. 카카오뱅크 송금이 아무리 하루 만에 온다 하더라도, '영업일 기준'일 테니 주말을 건너뛸 것이다.  


망했다.



결국 클라이맥스도 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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