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바나 가는 길
짜이의 역류성 인후염이 재발했다. 짜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때마다 발현하는 만성 질환인데, 이번 타이밍도 귀신같이 정직하다. 불타는 듯한 고통으로 가슴 안 쪽에서 바늘 수만 개가 쑤셔대는 느낌이라는데, 겪어보지 않았지만 짜이가 음식 앞에서 웃지 못하는 걸 보니 그 고통이 가히 짐작된다. 챙겨 온 약도 없어서 참는 것밖엔 달리 방도가 없다. 걱정돼서 너무 아프면 적당히 먹고 남기라고 했지만 짜이의 먹력은 포기를 모르지. 몇 초 이 악물고 아파하다가 한 입 먹고, 또 몇 초 동안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한 입 먹고,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다며 여러 입 먹더니 접시가 깨끗해졌다. 퍽 내 친구답다. 결연한 태도로 세 접시를 해치웠다.
"평소의 반도 못 먹었어. 한 접시만 더 먹을까?"
- 이미 남들보다 배로 먹은 거야^^
짜이 계좌 잔고가 꿈쩍 않는다. 토요일이라 은행 업무가 멈춰서 민주가 송금해준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하루만 더 빨리, 반나절만 더 빨리 송금받았더라면...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희상이 송금해준 돈도 다시 받아보려고 온갖 짓을 해봤지만 소용없다. 에휴.
하지만 괜찮아.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스마트한 호스트 안토니오 카드! 만나서 VPN 연결해 달라 하고 에어비앤비도 결제하고, 희상이 보내준 돈도 받자. 어떻게든 일단 아바나로,
가자! 체크아웃!
안녕, 올인클루시브 호텔아!
두 번은 안 올게!
바라데로 시내에서 여차저차 환전에 성공했다. 남아있던 돈 66쿡 + 환전한 돈 173쿡 = 239쿡. 갑자기 부자 된 기분이다. 이제 남은 건 아바나행 차편 구하기와 병원 가서 진료받기.
아바나로 가는 선택지는 세 가지다.
1) 올 때처럼 꼬진 택시를 구해서 쇼부친다
2) 시간 맞춰서 비싸고 고급진 리무진 버스를 탄다
3) 시간 안 맞으면 저렴하지만 열악한 로컬 버스를 탄다
3번은 사진으로만 봐도 거부감 확 드는 비주얼이었으므로 진짜 '어쩔 수 없을 때'가 오면 타기로 하고, 택시와 리무진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환전소 맞은편에 여행사 간판이 떡하니 보이는 게 아닌가. 주말이라 들르는 환전소마다 다 문 닫아서 택시 기사에게 돈 더 줘가며 겨우겨우 이 변두리 동네까지 온 건데, 사람도 별로 안 다니는 한산한 대로변에 여행사라니. 신기루 아냐? 놓치면 안 될 기회임을 직감한 짜이가 먼저 성큼성큼 여행사로 들어갔다. 경험이 사람을 키운다고, 우리는 바라데로에 도착한 날 쿠바 여행사 직원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존재인지 익히 배웠으니까.
8명만 들어서도 꽉 차는 작은 실내에 에어컨 공기가 빵빵하다. 천국인가? 믿음직스러운 직원이 리무진 버스를 안내해 줬다. 둘이 합쳐 50쿡이고, 한 시간 뒤 이 앞에서 버스가 정차할 거라고. "펄펙트!" 그 자리에서 예약을 마쳤다.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이렇게 고생 없이 깔끔하게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아 얼떨떨하다. 조금 무섭기까지.
일단 즐기자!
버스 오기까지 한 시간. 병원 미션은 무리일 것 같으니 아바나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패스. 요기나 할 요량으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너무 아무것도 없는 동네라 또 헛고생하는 거 아닌가 불안해지려는 즈음,
"우와우"
이거 뭐야? 레스토랑인가? 예고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비주얼 포스에 어리둥절한 가운데 몸이 막 앞으로 기울었다. 여기 쿠바 맞아? 청담동 아냐?
레스토랑 맞네...
이태리 요리인가...?
되게 비싸 보이는데 되게 들어가고 싶다...
뒤에서 짜이 목소리가 들린다.
"되게 비쌀 것 같은데?"
- 어어~ 메뉴판이나 한번 보자~
뒤에서 짜이 목소리가 들린다.
"왘씨 되게 비싸네!"
..
...
.
........
...
'환전 기념' 특식 되겠다.
비싸면 비싼 만큼 맛있는 법. 내일 길거리 푸드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나는 오늘만 살래.
씨푸드 메뉴가 훌륭할 필링에 여기서야말로 랑고스타 요리의 끝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눈물을 머금고 비교적 저렴하고 배부를 것 같은 '씨푸드 피자'로 타협. 옆자리 꼬꼬마가 먹는 두툼한 스테이크도 와구와구 먹고 싶지만, 비교적 저렴하고 배부를 것 같은 '라비올라'와 곁들임 맥주에 만족하기로 한다. 싸구려 병맥주를 막 아이스 버킷에 넣어다 주고, 애피타이저도 주고, 라비올라 위에 치즈도 직접 갈아줘서 하트가 뿅뿅했는데 요리까지 훌륭하다, 훌륭해.
"펄펙트!"
식도락 가뭄인 쿠바에서 이 정도면 별점 5개 만점! 내 다시 바라데로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들르리다. 돈 많이 가져가서 씨푸드랑 스테키를 왕창 먹겠소. 아, 그리고 시간도 많이 가져가겠소.
버스 놓칠까 봐 전략적으로 먹었다.
라비올라부터 해치우고 피자 한 조각씩 입에 물고 나머지는 포장. 들고 냅다 뛰었다. 하지만 버스는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이럴 거면 시간 예약을 왜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늦는 것보다야 버스가 늦는 게 속 편하니까 속 편히 있었는데, 나의 장은 심기가 불편하셨나 보다. 하긴. 용케도 버텼지. 기름진 음식에 밀가루에 술까지 먹었으니 화내는 건 이해한다마는, 왜 하필 지금이야?
버스 출발 후 5분째. 아바나까지 앞으로 3시간. 침착하자. 눈을 감고 따뜻한 손을 아랫배에 올렸다. 평화로운 호수를 떠올리자. 잔잔한 물결이 일고 볕이 부서지고 새가 지저귄다. 잠이 든다. 이건 응아 신호가 아니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아니야.
응아 신호가 틀림없다.
달랜다고 달래질 녀석이 아니다.
몹시 화가 나 있다.
미치겠다. 젠장. 어떡하지?
짜이도 슬슬 배가 아프단다.
난 슬슬이 아냐.
이봐 가이드 양반! 이 버스 언제 어디서 멈춥니까?
이 버스로 말할 것 같으면, 바라데로에서 아바나까지 직행한다는 고오급 리무진이다. 척 봐도 우리나라 고속버스에 견줄 만하다. 미리 예약을 해서였나, 길거리에서 우리를 태운 건 특이 케이스였던 것 같고 호텔마다 정차해 손님을 태운다. 그지 같은 버스네. 이러니까 한 시간을 늦었지. 신속하게 짐 태우고 사람 태우고 출발하는 패턴이라 화장실 가겠다고 내리는 건 불가능해 보여서 다시 눈을 감고 호수를 상상했다. 어느덧 버스는 만석이고 정차 없이 아바나로 직행할 분위기다. 잠들자. 제발, 잠들자.
'왜 하필 이런 더러운 종류의 시련이'
땀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더는 안 되겠다. 고속도로 진입하기 전에 이 버스를 멈춰야 한다. 기회를 캐치하기 위해 아까부터 앞에 서서 떠드는 가이드의 말을 주시했다. 저 세키는 왜 저렇게 영어를 웅얼거리면서 해? 수능 때 외국어 영역 듣기 평가 시간보다 더 집중했을 것이다. Last 어쩌구 Hotel 어쩌구 하는 단어가 들렸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군데 더 들르나 보다! 가방에서 휴지 꺼내고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나 갔다 올게. 출발 못하게 잡아둬"
짜이에게 유언을 남기며.
..
...
.
........
...
뒤늦게 해석한 가이드의 멘트는 '바라데로에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호텔이니 원한다면 여기 내려서 화장실에 다녀오십시오'였다. 아주 상식적이야! 아주 훌륭한 가이드야! 에어컨도 빵빵하고 쾌적하고 운전도 잘하고, 호호. 중간에 내려 피나콜라다 먹는 타임도 주고, 호호호.
"아까 나 뭐라고 하면서 버스 붙잡아둬야 되나 엄청 생각했어"
- ㅋㅋㅋㅋㅋㅋ 뭐라고 하려고 했어?
"뭐긴 뭐야. 이멀전시!!! 마이 프렌! 이멀전시!!"
꼴에 한 번 와 본 동네라고 아바나가 고향처럼 반가웠다. 아바나에 처음 도착했던 날처럼 해가 눕는 시각이었다. 3박 4일을 머물렀던 센트로 아바나를 지나 안토니오의 집이 있는 베다도에 도착했다. 센트로 아바나가 종로 뒷골목이라면 베다도는 강남 어디께 같은 분위기였다. 세련된 동네를 한참 걷고 헤매다 안토니오의 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어둠이 드리웠다. 대문 앞에 붙은 트립어드바이저 마크를 보고 또 한 번 스마트한 호스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조됐다.
집은 사진보다 훨씬 멋지고 깨끗하고 아늑했다. 문이며 가구며 바닥재며 얼른 봐도 그냥 부잣집. 1,2층엔 가족이 살고 3층 방 5개를 에어비앤비로 돌리는 것 같다. 3층으로만 통하는 문과 계단이 따로 있어 독립적이다. 보송보송한 침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풋타월, 핸드타월, 페이스타월, 샤워타월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고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삼성 TV가 있다. 냉장고에는 생수와 음료와 맥주, 미니 바에는 럼과 와인이 '수고했어 오늘도'라고 말 거는 것 같다. 물론 돈을 내고 먹어야 되는 거지만 우리는 곧 부자가 될 예정이니까, 와인이 특히 탐나는구나.
그런데 안토니오가 안 보인다.
"안토니오는 어디 갔어?"
방을 안내해 준 소년에게 물었다. 고딩 같은 데 점잖고 젠틀한 게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 지금 이탈리아에 있어. 나는 안토니오 동생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면 돼.
이탈리아?!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느낌이 싸하다.
이 자식,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보고 왔다, 여기가 쿠바라서 결제를 할 수 없었다, 안토니오가 VPN을 이용하면 결제할 수 있다고 했다, 구구절절 설명해줘도 모른다. 또 다른 형아 같은 이가 나타났다. 역시 점잖고 젠틀한데 고딩보다 똑똑해 보여서 다시 설명했으나, 모른다. 점잖고 멍청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 말하는데 얘도 영어를 웅얼거려서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VPN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거야? 안토니오랑 연락해 보라고! 뭔가 알아보려는 듯 왔다 갔다 분주하더니 역시 멍청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 하는게, 우리 폰을 VPN에 연결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혹은 지금은 못 쓴다? 같다. 썩을.. 배고파서 화낼 기운도 없다.
"우린 지금 현금이 없어서 숙박비를 지불하지 못해"
- 괜찮아. 체크아웃할 때 내면 돼.
고.. 고맙다.. 아주 위로가 되는구나..
하.. 희한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가만.
정신 똑 바 로 차리자.
남은 돈은 150쿡. 남은 날은 2박.
숙박비 내고 나면 딱 마지막 날 공항 갈 택시비만 남는다. 병원은 고사하고 밥도 못 먹게 생겼다. 그래도 하루만 굶으면 한국에 돌아갈 수는 있으니까 다행인가. 그보다 진짜 다행은 아까 피자 남겨서 포장해 온 걸로 저녁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간에 기별도 안 갈 양이지만 물을 많이 마시면 된다.
오늘은 밤도 늦었고 갈 데도 없으니 일단 여기서 자기로 한다. 내일 저렴한 숙소를 찾아가자. 아니, 안 되겠다. 우리가 아는 저렴한 숙소는 죄다 센트로 아바나에 있는데 결코 걸어갈 거리가 못 된다. 움직이는거 자체가 돈이라 꼼짝 말고 여기 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떡하지? 머리야 좀 굴러가라.
"그래도 한국인 많은 까사에 가면 돈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쿠바 사람들한테 물건을 팔까? 내 나이키 샌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던데"
"보조배터리나 손 선풍기도 팔 만하지 않아?"
배도 고프고 정보도 고프다. 누구한테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이 집 남자들은 말이 안 통하고 이 집 와이파이는 대답이 없다. 와이파이가 안 잡힌다고 하자 돌아오는 말이, "미안해.. 와이파이가 됐다 안 됐다 해"
하. 안 되면 그냥 안 된다고 해 줄래?
희망고문하지 말고.
'꾸며 쓰지 말자'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있었던 사실을 쓰는 건데 엔딩이 자꾸 이 모양이라 민망하네요. 13화 되도록 짠내 가시지 않는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