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 체험기
택시를 타고 까사 시오마라로 향했다. 까사(Casa)는 스페인어로 '집'. 우리나라로 치면 게스트하우스다. 하바나에는 3대 까사가 있다. 요반나, 호아끼나, 그리고 시오마라. 세 곳에 한국인이 모여든다. 까사마다 게스트들이 남겨둔 정보 북이 알짜배기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중에서도 짜이 지인이 추천한 시오마라(Xiomara)를 택했다. 검색도 예약도 비교도 없이.
기가 찼다. 창 밖에 펼쳐진 하바나는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풍경은 말이 안 된다. 하필 또 해가 눕는 시각이었다. 필름 카메라가 고장 난 상태라 어차피 찍을 수 없었지만 찍고 싶지도 않았다. 뭘 찍어도 그림이라 찍을 맛이 안 났다. 아무리 좋은 장면을 담아낸들 내가 잘 찍은 게 아닌 거다. 누구라도 그림처럼 담아낼 풍경이 이어졌다. 방금 최고로 예쁜 풍경을 지나쳤는데 다시 또 최최고로 예쁜 풍경이 나타난다. 이 도시, 나를 어쩔 셈인가.
예쁜 풍경이 잠시 소강되어 한숨 돌릴 틈이 생겼을 때, 택시가 정차했다. "여기가 까사 시오마라야" 어? 내리라고? ... 차 문을 열자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매캐한 매연 냄새와 시큼한 오줌 냄새가 뒤섞여 신경을 찔렀다. 다시 차에 올라 돌려달라 말하고 싶었다. 여태 지나온 아름다운 장소 어디로라도 데려다 달라고. 갑자기 웬 할렘가에 내려준 거냐고. 동시에 눈치 없는 내 두 눈이 '시오마라'라는 글씨를 발견해 버렸다. 시오마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보이는 것에 붙은 보잘것없는 간판. 아니야. 아닐 거야. 길가에 사람은 왜 이리 많은지. 그 골목에 나와 앉은 모든 쿠바노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웬 남자가 다가왔다.
"너네 시오마라 온 거야?"
- ... 응..
굳게 닫혔던 문이 그의 손에 의해 열렸다. 캄캄하고 높은 계단이 펼쳐졌다. 올라가라는 손짓.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짜이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한 발짜악. 두 발짜아아악. 굼뜬 행동을 합리화하듯 캐리어를 끙끙대며.
라운지에 들어서자 또 웬 남자가 다가왔다. "Hola!"
주인인가 보다. 멋있다. 희끗한 수염에 스트릿 패션. 선한 눈동자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만 말했다. 아주 쉬운 영어 단어만 눈치껏 알아듣는 듯했는데, 본인 입 밖으로는 절대 영어를 뱉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위해 느릿느릿 또박또박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래 봤자 스페인어라 못 알아듣는데도 아주 정성껏. 너무 답답해서 가슴팍을 두드리고 싶었다. 두드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까사 주인이 영어를 못해? 대체 왜 3대 까사인 거지? 이 동네 뭔가 기분 나빠. 하루만 묵고 다른 데 가야겠다.
스페인어와 영어. 서로 다른 언어라도 손짓발짓을 더하니 뭔가 예약 절차가 진행되긴 되고 있었다. 1인 1박에 10CUC이라는 걸 용케 알아들었다. 이어 "몇 밤 잘 거야?"라는 말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하루! 딱 하루!
짜이가 한 2초 고민하더니 말했다.
"2박만 하자"
- 2박 '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3박은 좀 그렇고"
- 아.. 어.. 3박은 좀 그렇다
"더 있게 되면 그때 돼서 연장하자"
2박과 3박 중 고민하는 짜이에게 1박을 들이밀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스리슬쩍 떠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래.. 첫날부터 까탈스럽게 구는 메이트가 되진 말자..
짜이가 그에게 말했다.
"2 nights. 2 nights 3 days"
손가락으로 보여줘 가며. 체크인/아웃 날짜를 짚어줘 가며.
그는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4개의 베드가 있는 방. 우리가 쓸 베드를 고르게 하고 개인 사물함 키를 줬다. 짐이 풀어져 있는 안 쪽 베드 주인도 한국인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하얀 시트와 베개 커버를 씌워줬다. 매우 정성스럽게. 스페인어를 또박또박 말할 때처럼.
그래.. 친절하고 청결하고 좋네.. 그래.. 지금 벌써 어두워졌는데 자고 일어나서 또 다른 숙소 찾고 옮기고 하려면 힘들 거야.. 2박 하길 잘 한 거야..
나중에 알았는데, 그는 주인이 아니라 시오마라의 여러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또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폰 가리키며 와이파이 어쩌고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 와이파이 뭐? 와이파이 카드? 어 나 샀어. 왜? ... 뭐라고? 어쩌라고?
쿠바에서 스마트폰 들고 걸어 다니며 서칭 하는 건 꿈도 못 꾼다. 정해진 장소에서만 와이파이가 터진다. 길가에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사람이 잔뜩 모여 있다면 거기가 바로 와이파이 스팟이라고 배워 갔다. Wow, 기대된다! 업무 톡 와도 못 받는 거네! 좋아라! 하는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
로밍하면 전화/문자야 되겠지만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한 건 Only Wifi. 쿠바 여행자에겐 '유심칩 사서 쓴다' '공용 와이파이 잡아서 무료로 쓴다'는 개념이 없다. 오로지 와이파이 카드 제도에 따라야 한다. 1시간에 1CUC 짜리 카드를 사서 ID/PW를 입력해서 쓴단다. 생경한 시스템이다.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1) 카드를 산다.
2) 은박지를 벗겨내면 비밀번호가 나온다.
3) 와이파이 잡히는 장소에 간다.
4) 평소 와이파이 잡듯이 목록에 뜨는 걸 선택한다.
5) ID/PW 입력하라는 창이 뜬다.
6) 카드에 있는 ID/PW를 입력한다.
7) 2개의 시간이 나오면 접속 성공이다.
하나는 현재 접속 후 흘러가고 있는 시간, 다른 하나는 그 카드로 사용한 누적 시간.
항상 이렇게 쉽게 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일단 카드 파는 데가 별로 없다. 관광객 많은 오비스포 거리(Obispo Street) 같은 데서는 까마득하게 긴 줄을 기다려야 된다. 길게 줄 선 무리 옆을 지날 때 내 가방에 5시간짜리 카드 있으면 되게 부자 된 기분이다. 그러니 판매소 보이면 미리미리 사두는 게 좋다. 한 번은 와이파이 가난뱅이가 되어 큰 호텔에 있는 판매소에 갔다. 근데 1시간 5CUC이길래 어이가 없었다. 주말에는 문 닫는 곳 많은 것 같으니 주의.
와이파이 스팟이 대중없다. 운 좋게 숙소에서 잡힐 수도 있는 거고, 30분을 걸어가야 될 수도 있다. 스팟에 따라 신호도 복불복이다. 팡팡 터지는 데가 있고 아무리 해도 안 잡히는 데가 있다. 잡혀도 잡힌 거 맞나 백번 의심하게 되는 속도일 때도 있다. 어제 팡팡 터지던 데가 오늘 먹통일 수도 있다.
비밀번호 가려진 은박지를 동전으로 긁다가 숫자까지 긁어버리면 망하는 거다. 돈 내고 새 거 사야 된다. 손톱으로 살살 긁는 게 좋다. ID/PW 모두 긴 숫자인데 숫자치인 나는 그걸 매번 입력하는 게 스트레스였다. 3개 입력하고 보고, 3개 입력하고 또 봐가며 접속하는데 한나절. 카드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하루는 폰 사진에 담았다. 사진 어플 열고 숫자 3개 보고 입력하고 멀티태스킹으로 다시 사진 어플 열고 3개 보고 돌아가서 입력하려는데 입력 전 화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음? 빡친다는 말임. 접속할 때마다 ID/PW 입력해야 된다. 어떨 때는 와이파이 껐다가 켜도 다시 입력하라는 창이 안 뜨기도 하는데 규칙을 모르겠다. 좋은 점은 데이터 양에 상관없이 시간으로만 체크한다는 것.
몇 번 해보면 요령이 생긴다.
우리는 그때쯤 여행이 끝났지만.
시오마라 가이와 우리의 불통을 보다 못한 게스트 한 명이 끼어들었다. 한국인인 그녀가 그와 스페인어로 대화하기 시작한 것. 역시.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였다. 그을린 피부, 부스스한 차림새,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자세가 한눈에 봐도 장기 여행자였다. 스페인어 할 줄 알면 예약할 때 좀 도와주지! 잠시 야속했지만 그런 상황을 자주 마주치면 나라도 귀찮아서 못 들은 척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전하는 말은 놀라웠다.
"와이파이 카드 사셨어요?"
- 네
"사셨으면 그걸로 여기서 와이파이 잡아서 인터넷 할 수 있대요"
- 네? 여기서요? 이 안에서요?
"네. 하실 거예요?"
- 네!!!
꿈만 같았다. 공원이나 큰 호텔에나 가야 와이파이 스팟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꼬진 숙소에서도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옛날 정보였나? 상관없다. 지금 여기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할 뿐. 마지막으로 인터넷 한 게 토론토 공항이었으니까 13시간 만이다. 의향을 전달했고,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냥 연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 연결만 하면 될 텐데,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가 온대요
"저 사람은 할 줄 몰라요?"
- 네, 이게 옆집 와이파이를 끌어다 쓰는 거라
자기가 할 줄도 모르면서 또 도와주려고 그렇게 열심히 설명한 건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불렀다. "Hey" 담벼락 위로 사람 얼굴이 올라와 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아까 밑에서 문 열어줬던 그 남자다. "Oh, Hi!" 멋쩍은 듯 웃는 게 낯가림 많은 소년의 표정이었다. 근데 이거 무슨 상황이지? 왜 거기서 나타나? 그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걸로 보아 늘 있는 일 같았다. 담 앞에 있는 사다리의 용도를 그제야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와이파이를 연결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대뜸 와이파이 카드부터 달란다. 뭔가 석연찮았지만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믿고 맡기는 수밖에. 카드를 가져가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먹튀 아냐? 살짝 불안했지만 연연하지 않았다. 사실 그즈음 와이파이에 대한 갈망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통역해준 한국인과 그 무리에게도 묻지 않았다.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뭔가 묻기 시작하면 폐를 많이 끼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도 깔려 있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와이파이 가이가 이번에는 폰을 달란다. 와이파이 연결하는 화면을 열어달란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시오마라의 탑 시크릿인 듯했다. 앞에 서서 잠자코 기다렸다. 한 번에 잘 안 되는지 그는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했다. 그러다 폰을 돌려주고 다시 어디로 가더니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다시 폰을 달란다. 와이파이 연결하는 화면을 열어달란다. 비밀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른다.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신중하고 진지하다. 그러나 또 안 되는지 다시 어디로 가더니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다시 폰을 달란다. 다시 열어달란다. 다시 눌러본다. 다시 어디에 간다. 다시 나타난다. 다시 폰을 달란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그쯤 되니 비밀번호도 대놓고 입력했다. 자꾸 사라졌던 게 집에 가서 비밀번호 바꾸고 온 거였다. 15151515로 바꿔보고 55555555로 바꿔보고 다시 15151515......
와이파이 이름 밑에 노란 글씨로 '인터넷 연결 없음'이라고 뜨는 거로 보아 공유기 문제가 분명했다. 나 IT 강국에서 왔어. 나 IT 회사 다녀. 너네 공유기가 이상해서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 폰 아무리 만져봐야 소용없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와이파이 가이는 영어를 못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열심히였다. 시오마라 가이까지 합세해서 열심히였다. 너네 대체 왜 이래..? 아이폰 UX에 익숙지 않은 그를 위해 언어 설정을 스페인어로 바꿔줬다.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한 시간 넘게 담벼락에 매달려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 사람에게.
알고 보니 그가 하는 행위는 이랬다.
1) 내 폰에서 와이파이 선택 > 비밀번호 입력 > 접속 실패 > 의아해함
2) 자기 폰에서 똑같이 해 봄 > 접속 성공 > 의아해함
이걸 수십 번 반복하는 거였다. 세상 심각하게.
이 행동을 중지시켜야 한다.
말을 고르고 골라 구글 번역기에 이렇게 써서 보여줬다.
내일 해도 돼요. 천천히.
mañana puede I. lentamente.
순간 그의 까만 얼굴이 빨개졌다. 땀 삐질, 하는 이모지처럼 멋쩍게 웃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를 응원하고 싶어 고마웠다고 말했는데 그는 미안하다고 답했다.
잠시 후 그들이 자리를 비웠다.
짜이가 슬그머니 공유기에 다가갔다.
전원을 껐다가 켰다.
와이파이에 접속됐다.
이 글을 쓰다가 무심코,
그에게 보여줬던 문장(mañana puede I. lentamente.)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봤다.
'내일 해도 돼요. 천천히.'를 '내일 내가 천천히 할 수 있어.'로 번역해 주다니. '니 도움 필요 없어'로 들렸겠다. 얼굴 빨개질만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