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의 위협
모든 사건의 발단은 이 엽서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모르겠다. 그냥 언젠간 저기에 가겠노라 다짐했다. '쿠바'하면 유명한 올드카니 모히토니 뭐니는 여행 준비 중에 알았다. 쿠바라는 나라 이름, 하바나라는 수도 이름, 그리고 사진 속 이미지.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나는 가 보고 싶은 나라가 별로 없다. 입이 딱 벌어지는 대자연도, 호젓한 휴양지도, 세련미 넘치는 도시도 웬만해선 마음이 달싹거리질 않는다. 흔히들 말하는 '아름다움'의 성격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만약 처음 본 쿠바 이미지가 화려한 올드카였거나 비치빛 카리브해였다면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데미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하는 '티켓팅'을 하고 있다니.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거다. 에어캐나다 직항으로 4번 비행하는 경로를 구했다. 인천-토론토, 토론토-하바나, 하바나-토론토, 토론토-인천. 짜이도 토론토-하바나 왕복 직항을 구했다. 다른 비행기지만 최대한 저렴하면서 비슷한 시간대를 잘도 찾았다. 좋아, 잘 하고 있어!
"나 이제 결제한다"
- 나도 결제한다
"와. 떨린다"
- 나도 ㅋㅋㅋㅋㅋ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우리의 무지(=무식)에 발목 잡혔다.
주의! VISA가 필요한 국가입니다.
비자..? 나 쿠바 못 가...? 즉시 검색했다. 쿠바는 입국 비자가 필요한 국가란다. 근데 에어캐나다를 타면 비행기에서 무료로 배포한단다. 휴, 다행이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가기 전에 공부 많이 해야겠다 다짐하고 일단 패스. 갈 길이 멀다.
여권 번호를 쓰란다. 모르는데..? 집 앞 카페에 있었다. 집에 가서 여권 들고 다시 카페로 갔다. 입력 클리어. 다음. 현지 연락처를 쓰란다. 현지..? 토론토? 쿠바? 쿠바는 숙소 예약도 안 했는데? 모르겠다. 그냥 짜이 토론토 집 주소와 연락처 쓰면 되겠지. 니 전화번호를 내놓아라. 빨리빨리! ... 근데 짜이가 답이 없다.
"아 미안 족발 뜯어먹느라고 손을 쓸 수 없었어"
욕 한 번 하고 입력 클리어. 다음. 드디어 결제 단계.
이상하다.
결제가 안 된다.
항공운임 및 좌석 확정 후 항공권 결제가 가능합니다. 상세문의는 여행사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예약 정보에 '요금 미확정'이라고 쓰여 있는 게 '확정'이라고 바뀌어야 결제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언제 어떻게 확정으로 바뀌는지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 없다.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다. 설 연휴 기간이라 고객센터 휴무일이었다.
망할 탑항공. 그지 같은 UI 참아가며 겨우 예약했는데. 내 돈 내겠다는데 왜 못 내게 해!
때려치우고 다른 데서 예약하려는데 무려 15만 원이나 더 비싼 게 아닌가. 갑자기 겸손해진다. 진정하자. 해답을 찾아보자. 탑항공 사이트에 있는 모든 텍스트를 정독했다. 눈 크게 뜨고. 천천히.
결제시한이 정확히 안내되어 있었다. 요금 확정이 안돼서 결제를 못하는데 아주 친절도 하셔라. 고객센터 운영 시간도 안내되어 있었다. 월~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말 및 공휴일은 휴무. 다시 말하지만, 때는 설 연휴 기간이었다. 2/18(일)까지 고객센터 휴무. 결제시한은 2/19(월) 오전 10시 30분.
그렇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1) 고객센터에 전화한다
2) 내 사정을 말한다
3) 요금 확정에 대해 묻는다
4) 요금 확정시킨다
5) 결제한다
오전 10시에 전화하는 걸 까먹거나, 30분 내로 성공하지 못할 시
...... 이하 생략한다.
짜이도 짜이대로 고생고생하며 결제를 완료했다. 그런데 직항이었던 항공권이 환승으로 바뀌었다는 것.
스카이스캐너에서는 직항을 제대로 선택했는데 이동한 예약/결제 사이트에서 환승 항공권으로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결제까지 해 버린 것.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직항편이 아닙니다. 환승 스케줄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요라르고델서
카 뭐? 카요라르고델서? 존재하는 도시냐?
지도에서 카요라르고델서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카톡창에 'ㅋ'이 넘쳐났다. 너 어디가? 제3세계로 가는 거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야?
다행히도 스카이스캐너에서 카요라르고델서(CYO)라는 도시의 존재를 확인했다. 쿠바긴 쿠반데 우리나라로 치면 저어기 무안공항 느낌이다. 정확한 스펠링을 찾아 Cayo largo del sur(카요 라르고 델 수르)로 다시 검색해 봤다.
바다 위에 내려주는 거 아니지? 심지어 토론토에서 하바나 가는 길목도 아니다. 저길 왜 들려? 저기 뭐 하는 데야?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은 크게 웃고 싶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있던 카페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조용했다. 입을 틀어막아도 돼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력을 다해 음소거해도 어깨가 춤을 추었다. 엎드려서 흐느꼈다. 누가 보면 우는 줄 알았을 거다. 울기도 했다. 정말 괴로웠다.
웃긴 건 웃긴 거고, 걱정됐다. 짜이도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웃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기가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못나온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 무서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으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발ㅋㅋㅋㅋㅋㅋㅋㅋ취소해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집에 가서 크게 웃었다.
'사고 시 환불 보장' 옵션을 구매하지 않았을 시 환불이 불가합니다.
짜이의 항공권은 신박했다. 원한다면 취소할 수 있지만 환불은 못 해줘 정책. 다행히도 존재하는 항공사임을 확인했다. 사기는 아닌가 보다. 짜이는 정체 모를 섬에 들르기로 했다. 하바나에 먼저 도착하는 나는 공항에서 5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짜이 카메라 속 카요라르고델수르 공항(CYO)은 너무나 귀여웠다. 환승 경험이 어땠는지 자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시끄러워 뒤지는 줄 알았어 그 비행기에 나 빼고 다 파티 분위기였어. 그래도 난 잘 잤다"
응, 잘했다. 그 답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왜냐하면 하바나 공항에서 짜이를 잃어버릴 뻔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