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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Sep 03. 2018

내 병은 내가 알아

병원 체험기 1


여행 마지막 날. 

가고 싶은 마켓이 있었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는단다. 그토록 원하던 돈이 생겼지만 막상 쓰려니 딱히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배가 부른 거지.


어딜 가든 일단 병원부터 들르기로 했다.


2박 3일 동안 붙이고 있던 동전 파스. 오른쪽은 소화제 (짜이 먹성 따라가려면 필요)


어디서 주워 들었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쿠바가 의료 선진국이라고 하니 내 발가락 상태부터 확인하고, 가능하면 장염과 인후염 진료받고 약을 받아보기로 했다. 하루라도 건강한 컨디션으로, 넉넉한 주머니로 여행해 보자. 마침 숙소에서 걸어서 6분 거리에 커다란 병원 단지가 있다. 얼마나 큰지 멍청한 맵스미가 ‘대저택’이라고 번역해 놓은 걸 보니 아바나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 같다. 마지막 날이라고 하늘도 도와주시나 보다. 단 하나, 일요일인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 병원 문 열어?"

안토니오의 집에서 일하는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 당연히 열지~

"일요일인데도 열어?"

- 하루 24시간, 매일 열려 있어 쿠바 병원은

"와우, 완전 멋있다!"

의료 선진국이 헛소문은 아닌가 보다.






6분은 개뿔


36분은 걸어 다닌 것 같다. 뙤약볕 아래 절름발이. 하늘이 돕긴 뭘 도와 이제 와서.. 

아파서가 아니라 새끼발가락에 힘 실리지 않게 걷느라 절뚝거려지는 거다. 지금 발가락 상태가 어떤지 모르니 가능한 보호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발가락은 거의 아프지 않다. 그냥 하루만 참고 한국 가서 진료받아도 될 일인데 나 왜 사서 고생일까? 하..


깁스한 꼬마도 보이고 목발 짚은 할머니도 보이는 게 병원 근처에 다다르긴 한 것 같은데 당최 어딘지 모르겠다. 오가는 이도 드문드문한 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사람 붙잡고 물어봤지만 서로 기운 빠진다. 센트로 아바나에서 영어가 잘 통했던 건 아무래도 관광 지역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여기 베다도에선 안 통한다. 발가락 보여주며 '아야' 시늉해도 제3세계 언어(=스페인어)만 되돌아온다. 나 대신 앞장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주는 짜이가 고생이 많다.



걷고 걷다가 드디어 '대저택' 입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막혀 있다. 뭐야.. 일요일에도 연다며.. 지도상으론 제대로 찾아오긴 한 것 같은데 뭐지? 우리를 본 경비원이 슬금슬금 나왔다. 짜이는 그와 대화하기 시작했고, 물어봐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은 나는 옆 건물을 염탐하러 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짜이 목소리가 들렸다.


"그 건물이 병원인가 봐!" 


가운데 파란색이 대저택, 위쪽 파란색이 우리가 간 병원


눈을 씻고 지도를 다시 봤다. 찬찬히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다시 보니까 대저택은 말 그대로 '대저택'이고 병원은 병원이었다. 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것뿐. 멍청하게도 그걸 '병원 단지가 커서' 대저택이라 오역한 줄 알았다. 오역이 아니라 오인이다 오인. 맵스미를 얼마나 불신했으면... 

사실 어제 버스 타고 대저택 옆을 지날 때 '뭔데 이런 대단지가 형성돼 있지?' 궁금했는데 지도에서 병원 마크를 보곤 사립 재단 같은 걸 상상하며 멋대로 정보를 조합해 버린 것이다. '어제 버스에서 본 곳 = 병원'인데 번역이 대저택이라고 돼 있네? 웃기당! 이런 식으로. 휴. 한심하당.


번역기에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온 병원 건물들은 의학연구소였다. 길 건너에 있는 Hospital Universitario 어쩌고가 종합병원 격의 대학병원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건물은 바로바로 정형외과! 아까 본 꼬마와 할머니가 여기서 치료받고 간 게 틀림없다. 근데 왜 이렇게 허름해 보인담?






쿠바 병원에 나타난 동양 여자 둘


입구에 들어서자 수십 개의 눈이 일제히 우리에게 꽂혔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다. 철저히 쿠바노만 있는 로컬 주민만의 공간에 들어온 건. 그것도 하필이면 병원. 우릴 신기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당연하긴 한데 왜 때문에 쫄리냐.. 환자님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구도로 찍힌 영상에서 겨우 건진, 병원 로비 풍경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뭘 하는가? 

그렇지. 접수를 한다. 나 어디 아파서 왔어요, 말하고 신분을 밝히고 차례를 기다린다. 한국이라면 동네 의원이든 대학병원이든 다 그렇게 한다. 근데 이놈에 병원은 환자만 잔뜩 있지, '접수처' 같이 생긴 게 없다. 동공지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애써 외면하던 수십 개의 눈과 마주쳤다. 이 공간의 모두가 우릴 주시하고 있다.

그때 로비 옆 방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나타났다. 간호사 맞나? 모르겠다. '간호복 같은 걸 입은 사람'이라고 정정한다. 그녀는 로비에 놓인 책상이 제 자리인 양 앉았다. 책상 위에는 마치 차트 같은 파일이 놓여 있다. 저 책상이 접수처인 모양이다. 짜이가 먼저 용기 있게 다가가 "내 친구 발가락이 아픈데, 샬라샬라~" 용건을 말했다. 그런데 이 여자, 돌아오는 답이 제3세계 언어다?


"얘 영어 못하나 봐.."


큰일 났다.

병원은 똑똑한 사람들이 일하는 데니까 당연히 영어가 통할 줄 알았다. 아니, '불통'은 아예 보기에도 없었다. 번역기에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라고 써서 보여주니까 생각도 안 해 보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와씨 복병이다.. 하는 수 없지..

신발을 벗고 새끼발가락을 보여주며 '아야' 시늉을 했다. 책상에 부딪치는 시늉도 했다. 내 쇼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수십 개의 눈이 등 뒤로 느껴졌지만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냐. 절박함이 통했나? 무서울 정도로 엄숙한 표정이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뭐라뭐라 씨부리곤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아닌가. 어디 가..? 뒤를 슬쩍 보더니 따라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 한다. 어어! 갈게! 잽싸게 절뚝절뚝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컴컴하고 사람이 없다. 문이란 문은 죄다 굳게 닫혔다. 의사에게 데려다주는 건가? 외래 진료하는 방은 아까 그 로비 쪽인 것 같았는데? 저기 환자들 다 대기 중인 거 아냐? 왜 우린 대기 안 시켜? 걸음 하나에 불안 백 개가 따른다. 이 여자, 간호사는 맞나? 간호사라기엔 너무 날티난다. 육감적인 피지컬에 화려한 액세서리야 쿠바노 공통이니 그렇다 치는데, 환자 대하면서 음악 듣는 건 대체 무슨 경우지? 윗옷 주머니에 찔러 넣은 휴대폰에서 싸구려 음질로 쩌렁쩌렁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스피커다. 진짜 후리하네... 이 사람 계속 따라가도 되는 걸까..? 불안이 천 개쯤 따랐을 때, 'X-ray'라는 글씨가 보였다.


"여기야! 여기!"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문 앞에 붙은 글씨. 엑스레이 촬영실이 분명하다. 의사고 뭐고 만날 땐 만나더라도 엑스레이부터 찍어야 한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야 나중에 만난 의사와 불통이더라도 내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통증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찍으나 마나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문제없음'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여기 들어가서 내 발을 찍어줘"

라고 온몸으로 말했더니 그녀는 의외로 쉽게 문을 열어줬다.


커다란 엑스레이 촬영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싸구려 BGM도 따라 들어왔다. 촬영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반갑게 인사 나누는 걸 보니 친분 있는 동료 사이 같다. 이쪽은 나이는 좀 어려 보여도 제법 전문가 냄새가 난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긴 매한가지. 또 신발을 벗고 '아야' 하고 기계를 가리키며 내 발을 찍어달라고, 몸으로 말했다. 아아.. 현타.. 


좌 BGM 주인, 우 촬영실 주인 (번역기 보는 중)


BGM 주인은 아주 간단한 영단어도 못 알아들었는데 이쪽은 단어 정도는 이해하는 모양이다. 알아들었다는 고갯짓과 미소를 날리며 기계 위에 올라가 앉으란다. 워어, 잠깐만. 아무 절차도 없이? 지금 당장? 나야 고맙지만 "하우머치?" 얼만지는 알고 찍자. 25쿡이란다. 약 처방도 포함된 가격이냐 묻자 그렇단다. 제대로 알아듣고 하는 대답인진 모르겠으나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어떤 한국인이 쿠바 병원에서 말도 안 되게 100쿡 불러서 눈탱이 맞을 뻔했다던 블로그 글을 봤는데, 얘네는 그런 족속은 아닌 것 같다.


"OK" 



기계가 좀 누렇긴 하지만 생김새와 촬영 방법은 한국과 같았다. 정면으로 한 번 찍고, 측면으로도 한 번. 짜이가 두 쿠바노와 함께 룸에 들어가 촬영 결과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동안 나는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오더를 기다렸다. 근데 이 사람들이 안 나오고 안에서 쑥덕거리고 있네. 뭐 하는 거야? 기계랑 나만 남겨놓고. 


잠시 후 촬영실 주인이 다가와 샬라샬라거렸다. 

다소곳하게 앉아 얼굴에 물음표 띄우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답답해하더니 휴대폰에 뭔가를 써서 보여줬다. 오오 번역기 앱도 쓸 줄 알아? 지성인일세! ... 하는 생각 1초. 그 안에 든 문장은 경악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A broken finger in the footing


... broken?????



"브로큰??? 리얼리???"


엉터리 문장이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단번에 전달됐다. 핵심은 '부러졌다'는 것.


심장이 쿵 떨어졌다. 또 골절이라고...? 야, 너, 브로큰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거 아냐? 양 검지 손가락을 교차했다가 떼는 동작을 하면서 니가 말하는 브로큰이 이 의미 맞냐?를 몇 번 물었는데 그렇단다. 브로큰이란다. 장난해? 난 그냥 선베드에 부딪친 거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으니까 얘도 따라 웃으면서 "브로큰"을 반복한다. 웃기냐? 이게 웃겨?

못 믿겠어서 사진을 보자고 하니까 자신만만하게 룸으로 들어오란다. 엑스레이 사진을 띄워 새끼발가락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엥.


"어디가 브로큰이라는 거야?"

- 모르겠어 안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부러진 데가 없는데 얘는 자꾸 멀쩡한 발가락을 짚으며 "브로큰" 거린다. 얼굴을 모니터에 밀착하고 봐도 모르겠다. 예쁘게 네일 케어한 손톱만 눈에 들어온다.


장난 그만 쳐라. 

야, 내가 너랑 소통이 안 돼서 말은 못 하지만 골절 경험자야 왜 이래. 사람 잘못 골랐어. 기분 나쁘게 얘가 실실 웃으면서 장난기 담은 표정으로 말하니까 더 못 믿겠다. 아니. 믿고 말고를 떠나서, 부 러 진 데 가 없 다. 


짜이는 불안해했지만 나는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안 부러진 거 확인했으니 됐어" 


트릭에 잠깐 말릴 뻔했지만 어쨌든 '문제없음'이니 병원에 온 용건을 끝낸 것이다. 촬영실 주인이 '브로큰' 거리거나 말거나 같이 실실 웃어줬다. 마음이 편해지니까 엑스레이 찍어주고 친절하게 대해준 이들에게 고마움마저 피어났다. 아깐 속으로 욕해서 미안. 


"이 엑스레이 찍어가도 돼?" (물론 몸으로 말함)

- 당연. 폰 줘 봐 (얘도 몸으로 말함)



대뜸 따라 오란다. 

촬영실에서의 할 일은 다 끝났고 다음 할 일을 위해 이동하자는 것 같은데, 저기 우리는 이 병원에서 할 일이 다 끝난 것 같아. 라고 말하려면 또 한참 걸리고 피곤하니까 떠밀리듯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신세가 되어보기로 한다. 데려간 장소는 치료실. 오, 그래 치료받아서 나쁠 거 없지!


거즈를 꺼내더니 약지 발가락과 새끼 발가락을 통으로 감고 정성스럽게 반창고로 마무리한다. 약지 발가락이 지지대 역할인가 보다. 한국에 언제 돌아가냐고 물어서 내일 간다고 했더니 간단한 조치만 해준 것 같다. 나 하나 치료하는데 쿠바노 네 명이 달라붙었다. (BGM 주인, 촬영실 주인, 치료실 주인, 모르는 사람1) 넷 다 영어 불통자. 치료실 주인이 주도적으로 뭐라뭐라 하는 게 왠지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것 같다. '아이스' 어쩌고가 얼음찜질을 말하는 것 같은데, 지금 물리치료를 하러 가자는 거야? 나더러 직접 하라는 거야? 


"아이스, 마이셀프?”

- ,!,₩/@-@;:-


하.. 얘네 '마이셀프' 몰라..

네 사람이 손짓 발짓해대는 걸 조합해 보니 '얼음찜질을 10분씩 해라, 물은 닿게 하지 말아라' 같다.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말하는 건 나더러 직접 하라는 거겠거니. 오케 언더스탠 그라시아스! 



휴. 

이제 영수증 받고 돈 내는 일만 남았지? 

또 따라 오란다. 


치료실 옆에 딸린 아무도 없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쪽방 같다. 여긴 뭐 하는 데야? 할 게 더 남았나? BGM 주인과 촬영실 주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방문을 닫았다. 은밀한 분위기다. 어떤 환자가 모르고 문을 발칵 열자 막 주의를 주면서 다시 닫는다. 실실 웃던 촬영실 주인도 갑자기 진지해졌다. 뭐지. 


그들의 용건은 이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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