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체험기 2
쿠바 병원.
엑스레이를 찍었고, '브로큰' 됐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부러진 데가 보이지 않았고,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치료실 옆 쪽방.
"아까 25쿡이라고 했잖아~ 근데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10쿡을 더 내야 돼"
그들의 용건은 돈이었다.
난 또 뭐라고! 쫄았잖아! 근데 왜 이렇게 비밀스럽게 말하는 걸까. 돈 더 내는 건 상관없는데 얘네 태도가 이상하다. 왜 문을 꽁꽁 닫고 말하는 거야? 꼭 나쁜 짓하는 사람처럼? 그냥 주기엔 뭔가 미심쩍다. 촉이 안 좋아.
es secreto sobre?
(이거 비밀이야?)
왜 밖에서 말 안 하고 여기서 말해? 그리고 여태 접수 절차도 없이 너네 나 신원 확인도 안 하고 치료까지 해 준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까 의사한테 진료도 안 받았잖아? 치료비 10쿡은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잖아? 라는 말을 다 번역하면 엉망 문장이 나올 테니까, 고심 끝에 '이거 비밀이야?'를 골랐다.
"오! 논 시크릿!"
휴대폰을 향해 나란히 고개 내밀던 두 사람이 양손을 세차게 가로젓는다. 허허허 웃으면서 '뭔 소릴 하는 거냐'는 듯이, 세상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왜 '시크릿'이란 단어를 꺼냈는지 말을 잇고 싶지만,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겠네. 아오 답답해! 급할 땐 본능적으로 표정이 말을 해준다.
'논 시크릿인데 왜 여기서?' (우리 표정)
- 아유~ 그게 아니라~ (얘네 표정)
'그게 아니라 뭐? 왜 밖에 안 나가?' (우리 표정)
- 말할 방법이 없어서 답답해 죽겠다 우리도.. (얘네 표정)
안 믿어주면 왠지 실례가 될 것만 같은 곤란한 상황. 여기서 얘네랑 시간 끌 수록 여행할 시간만 축나고 솔직히 더 말하기도 귀찮고. 아 몰라!
쿨하게 35쿡을 내어줬다.
얼른 영수증 받고 나가자. 장염이고 인후염이고 몰라, 됐어, 진료 안 받아. 무리. 포기.
seguro para el tratamiento de los certificados y recepcion de mi
(보험 처리해야 되니까 증명서랑 영수증 줘)
이제 정말 우리의 마지막 용건.
휴대폰을 향해 나란히 고개 내밀던 두 사람이 이번엔 튕기듯 떨어져 나갔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른 액션.
"오! 놉!!!"
뭐? '놉'이라니? 번역기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두 사람이 양손을 세차게 가로젓는다. 세상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리면서 '뭔 개소리냐'는 듯이. 아까 그 허허실실 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태도가 돌변했다.
가만. 돈 받았다 이건가? 그거 외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런 단호박이 없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놉'부터 들이밀고 '놉'만 들이는 두 사람. 아니 왜? 돈 냈으니까 영수증 달라는데 왜 안 된다는 거야. 왜. 왜!
"너네 나라로 돌아갈 거잖아?"
- 어 내일
"그래! 그러니까~"
뭐래. 내일 떠나는 거랑 영수증이 무슨 상관이야. 한국 가서 '뭔가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다. 아아 됐고, 영수증이나 내놔. 내일 간다며? 어 내일 가. 너네 나라 가서 !%*(!&@)$~)(&^%~ 아아 됐고, 영수증이나 내놔. 내일 간다며? 됐고, 난 영수증이 필요해. 불통이 이어지는 중 또 환자 한 명이 문을 발칵 열었다. 이번엔 실수로 연 게 아니라 할 말이 있는 듯, 간호사로 추정되는 BGM 주인에게 뭐라뭐라하니까 그녀도 뭐라뭐라 되받아친다. 분위기상 환자 쪽에서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난 것 같다. 이 사람이 1시간 가까이 우리만 따라다니고 있으니 다른 환자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일 수도 있다. 미안해요. 우리도 그만 하고 나가고 싶어.
또, 따라오란다.
휴.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나 보네.
또 다른 쪽방.
의사한테 데려다주는 아니었어?
촬영실 주인은 어디로 가 버렸고, BGM 주인만 남아 심각한 표정으로 못 알아듣겠는 말을 쏟아낸다. 한 단어도 제대로 주워 담지 못했는데 또 환자가 들이닥쳐 흐름이 끊겼다. 이번엔 환자한테 대꾸도 안 하고 화도 안 내고 자기가 나가 버린다. 우리더러 따라오라면서. 너 좀 짜증 났나 보다?
알았다.
이건 논 시크릿이 아니라 '탑 시크릿'이었던 거다. 그러니까 누가 들으면 안 됐던 거고, 그래서 환자 없는 방으로 우릴 끌고 다닌 거다. 와, 소름 끼친다. 돈도 받았겠다, 우릴 병원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모두가 해피해지는데 빌어먹을 영수증이 발목을 잡은 거다. 저런. 어쩌냐, 우리도 그냥은 못 가겠는데.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영수증을 요구했다. '니가 하는 말 다 못 알아듣겠고, 영수증이나 내놔' 모드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라는 식의 위압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나가는 BGM 주인. 허. 지금 기분 나빠할 사람은 나거든?
돌아온 그녀의 손에 웬 종이가 들렸다. 도장이 찍혀 있고 휘갈겨 쓴 글씨가 적힌, 얼핏 보면 영수증 같은 종이다. 하지만 이게 영수증일 리가 없는 게, '35'라는 숫자가 없다. 개발로 썼어도 아라비아 숫자는 알아본다. 이건 내가 지불한 35쿡을 영수하는 증서가 아닌 거다. 근데 "이거 영수증이야?" 물으니 그렇단다. 목 뒤에서 '빠직' 하는 게 올라왔다.
장난하나.
영수증 맞냐 또 물으니, 그렇단다.
ㅆ, 뱉고 싶다 쌍시옷..
이제 이 말 저 말 섞고 싶지도 않다. 하..
de todos modos, recibos, por favor
(어쨌든, 영수증 줘)
화난 걸 눈치챘는지 BGM 주인은 촬영실 주인에게 가서 SOS를 쳤다. 둘이 속닥거리더니 또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내밀었는데,
Promotion cold in 10 minutes
야!
영수증 달라고 영수증!!!
얼음찜질 10분을 왜 적고 있어!!!!!!!
지친다 이제.
얘들이 우리한테 사기를 치는 건지, 여기에 영수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요, 얼음찜질 10분 할게요, 하고 싶어 졌다. 너네가 이긴 걸로 하세요.
정말 포기하려 할 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렸다.
영어다!
하얀 얼굴 노란 머리의 키 큰 여자. 쿠바노는 아닌 것 같은데 여행자 같지도 않은 여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리춤에 손 짚은 걸 보니 모니터에 띄워진 골반 엑스레이의 주인인가 보다. 환자로 온 그녀가 우리를 굽어보며 영어로, 두 쿠바노를 보며 스페인어로 '무슨 일이냐'고 말을 건 것이다. 오, 신이시여! 원한다면 기꺼이 통역해 주겠다는 눈빛이다.
뭐하는 사람이지? 분위기상 이 공기를 낯설어하지 않은 게 왠지 현지 사정에 밝아 보인다. 한두 번 온 게 아닌 모양인데? 하지만 지금 신분을 궁금해할 때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분의 신분은 '구세주'다.
"우리는 투어리스트야. 발가락 브로큰 돼서 치료받았어.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보험 처리를 해야 돼~"
- 으흥,
잘한다, 우리 짜이.
위기상황일수록 문장력이 폭발하는구나. 생존 영어에 강한 타입일세.
"근데 얘네가 영수증을 안 주고 있어. 이미 35쿡을 지불했는데"
- 왓? 35쿡?
구세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모든 걸 말해주는 표정.
그리고 짧은 정적.
구세주의 시선이 두 쿠바노에게로 향했다. 그들에게 쏘아진 책망의 눈빛. 심하게 흔들리는 네 개의 눈동자. 세 사람이 뿜어내는 기류에 우리는 갑자기 사건의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나 버렸다. 1미터 거리의 관찰자가 되어 눈만 꿈뻑꿈뻑.
두 쿠바노가 구세주를 향해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 분위기로 시작하더니 '제발 믿어줘' 강도로 변하는 게, 알아듣진 못해도 구구절절 애절한 랩사위다. 내용이 궁금한데 구세주가 속 시원히 통역해주질 않는다. 원래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 은근히 우릴 의식하는 게 처음엔 그들을 도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듣자 하니 35쿡은 너무 했잖아? 이건 나도 커버 쳐줄 수 없어, 입장이 된 모양이다. 우리한테 필터링해서 통역하는 게 니 편도 내 편도 안 하려고 눈치 빠르게 발 빼는 느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구세주의 말투는 단호했고, 그들은 '깨갱' 했다. 설마 쇼하는 건 아니겠지.
또, 따라오란다.
또?
BGM 주인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검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 보였다. '조용히 하고 따라오라'는 제스처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구세주도 따라가 보라고 거든다.
"어디로 가는 거야?"
- 노 프라브럼. 한 번 믿고 가 봐
어디로 가냐 묻는데 '믿고 가보라'니.
"... 진짜지?"
멋쩍은 듯 웃으며 어깨를 들썩하는 게, 확신을 주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저 자긴 할 만큼 했고 '행운은 빌어드릴게'하는 뉘앙스다. 그래, 제삼자가 사건에 휘말려야 될 이유는 없지. 알았어. 고마워!
이번에야말로 의사에게 데려다주는 줄 알고 따라나섰지만 BGM 주인의 발길은 병원 밖으로 향했다. 의사가 다른 건물에 있는 걸까? 설마. 우릴 밖으로 보내버리려고 직접 배웅하는 걸까? 설마. 그럼... 혹시 약국? 그래, 약국이다! 아까 '약 포함된 금액이냐' 물었던 게 떠올랐다. 약국이라면 우리도 어디 있는지 아는데.. 직접 찾아갈 수 있는데.. 달라는 영수증은 끝까지 안 주겠다는 거구나, 알았어. 우리가 알아서 갈게. 졌다.
"저.. 저기!"
한참을 앞장서서 걷던 그녀가 '홱' 돌아서 또 '쉿' 동작을 한다. 무섭게 눈을 치켜뜨는 게, 더 이상 아무 말도 섞지 않겠다는 의지다. 다시 '홱' 돌아서 파워워킹하는 뒷모습에 화가 덕지덕지 붙었다. 뭐야? 왜 화났어? 네가 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소리 들켰다간 귓방망이를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목적지는 정말로 약국이었다. 자기 돈 내고 약을 하나 샀고, 내게 내밀며 또 '쉿' 제스처를 날리곤 떠나 버렸다. 이제 됐냐는 듯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똥 밟았다는 듯이.
받았는데 털린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약국은 무척 조용했고, 약사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반창고를 떼어 다시 붙였다. 너무 꽁꽁 싸매 놔서 불편한 걸 내내 참고 있었다. 약국 앞 길거리에는 그녀가 사준 것과 같은 핑크색 약 케이스가 빈 채로 여기저기 버려졌다. 검색해 보니 아스피린 같은 진통제. 흔히 먹는 싸구려 약인 듯한 그것은 통증이 없는 내겐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35쿡이면 우리 돈으로 4만 원 돈.
그래. 에피소드 값으로 나쁘지 않다. 그 돈으로 그들이 우릴 안주 삼아 하루 회식하며 행복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쿠바 병원에서 엑스레이 찍어본 한국인, 거의 없겠지?"
- 엌ㅋㅋ 아마 한 명도 없지 않을까?
게다가 발가락 상태도 '문제없음'이라 확인했으니 더 바랄 것도 없다. 그거면 됐어.
유독 덥고 유독 많이 걸은 날이었다.
비를 피해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그 날 찍은 사진을 하나씩 감상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다시 생각해도 웃겨서 짜이와 나는 몇 번이나 꺄르륵 댔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들이 우리를 VIP로 대접해줬던 것 같다. 만약 35쿡을 지불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했더라면? 그 많은 환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대기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어디서도 기다리지 않고 프리패스였고 그들은 우리만을 위해 서비스했다. 4만 원으로 시간과 서비스를 구입한 셈이었다. 거기다 대고 영수증이나 내놓으라고 했으니. 뒤늦게 미안해졌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다가 촬영실 주인이 찍어준 엑스레이 사진을 발견했다. 대체 어디가 브로큰이라는 거야? 무심코 사진을 확대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댕, 얻어 맞은 느낌.
"나.. 브로큰 된 거 맞나 봐.."
새끼발가락에 작은 뼈 조각이...
선명하게 떨어져 나간 조각이...
보였다.
촬영실 주인이 네일아트한 손톱으로 짚어 보이던 바로 그 위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