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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키미 Oct 04. 2018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미식가


'똑똑똑'


조식이다. 약속했던 8시에 정확하게 나타나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소개한 여자의 손에 푸짐한 트레이가 들렸다.


"이게 다 뭐야?"


여행하는 동안 쿠바 음식(또는 쿠바노의 요리 스케일)에 완전히 마음 상했던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밤에 조식 주문하겠냐는 물음에 잠시나마 망설였던 나를 나무라고 싶다.




토스터기에 구워낸 빵과 폭신폭신해 보이는 에그 스크램블, 귀엽게 자른 버터와 잼, 살구빛 구아바 주스, 진한 블랙커피와 곁들여 먹을 만큼의 우유, 꿀과 설탕과 소금, 그리고 과일 한 가득이 두 개의 트레이에 테트리스 하듯이 담겨 왔다. 방 안으로 길게 뻗은 햇살을 벗 삼아 신성하고 신속하게 촬영 의식을 치렀다.




커피부터 호로록.

아바나에서의 첫 숙소 시오마라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진한 블랙커피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식도에 뜨거운 커피를 흘러 보낸다. 내겐 여행 컨디션을 좌우하는 세 개의 룰이 있다. 하나는 현지에서 먹는 첫 끼요. 둘은 잘 밤에 들이켜는 톡 쏘는 맥주. 셋은 적절한 타이밍에 공급되는 카페인이다. 시오마라를 떠난 이후 바로 이 세 번째가 아쉬웠는데, 마지막 날에야 혈관에 피 같은 게 좀 도는 기분이다.


짜이는 다른 건 거들떠도 안 보고 빵부터 집어 든다. 버터를 듬뿍. 잼도 듬뿍 바르고 '앙'. 바라데로 호텔에서 질겅질겅한 빵만 씹다가 오랜만에 빵다운 걸 먹는다. 창 밖에선 새 지저귀는 소리, 입 안에선 바삭바삭 행복 씹히는 소리, 포크가 접시에 닿고 티스푼이 잔에 닿는 소리. 예쁜 아침이다.




구아바, 파파야, 파인애플, 바나나, 수박.

사탕수수 재배지인 쿠바. 과일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하는 기대는 사실 와장창 깨진 지 오래다. 철이 아니라 그런가? 해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단한 맹맛이다. 오죽하면 바나나가 제일 맛있다. 한국에서 먹는 바로 그 맛의 바나나.

궁여지책으로 빵+꿀+바나나를 조합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우는, 나만의 토스트를 만들었다. 스타벅스 피너츠 바나나 샌드위치만큼은 아니지만 엄, 청, 맛있는데 짜이는 어째 관심이 없다.






다른 우리


조화로운 식사를 지향하는 우리.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우리는 좋은 식사 메이트임에 틀림없지만 식사법만은 상반된다. 재밌게도 이 식사에서 다른 점이 뚜렷이 나타났다.


나는 입 안에서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퍼석한 빵을 먹었으면 다음엔 촉촉한 과일과 우유, 달달한 바나나 토스트를 먹었으면 다음엔 진한 커피, 이런 식이다. 버터만 바른 빵을 먹을 땐 커피에 우유를 섞는다. 식사 시작부터 끝까지 밸런스가 깨지지 않도록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골고루 집어 먹는다.

반면 짜이에겐 식사 전체의 밸런스가 중요해 보인다. 빵과 에그 스크램블로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과일을 후식 삼아 먹고, 그러고 나서 주스 마시고 커피 마시는 식이다. 식사를 끝내기 전까지 주스는 손도 안 댄다.

비유하자면 나는 세트메뉴 파, 짜이는 코스요리 파랄까. 분식점에서 김밥 한 줄을 시켜 먹는다면? 내가 김밥 한 입에 된장국 한 모금 호로록하길 반복하며 한 줄을 비운다면, 짜이는 김밥 한 줄 마지막 꽁다리까지 다 먹은 뒤에 된장국을 들이켤 것이다.


희한하게도 평소 갈증을 잘 안 느끼고 물도 잘 안 마시는 짜이는 식사 전∙중∙후에도 물이 필요 없단다. 나로선 퍽 기이한 일이다. 목멜까 봐 음료 권할 때마다 "괜찮아"하며 눈 앞에 음식을 줘 패는 모습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더 많은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인가? 식사의 여운을 길게 즐기기 위해서인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본다. 나도 갈증을 참으면 짜이만큼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되도 않는 상상도.



같은 우리


시오마라 조식에 나온 수제 요구르트도 그랬다. 식사 중간중간 홀짝홀짝 마신 나와 달리, 짜이는 빵과 에그 스크램블 접시를 깨끗이 비운 뒤 요구르트를 벌컥벌컥. 식사를 다 마친 줄 알고 마담이 병을 치우려 하자 짜이가 황급히 저지했다. 그렇게 두 잔 반을 클리어. 한 잔에 한 끼 분량의 포만감을 줄 정도로 걸죽한 요구르트였다. 


신기하게도 

또 그 와중에 이렇게 다른 듯 같은 시선을 담았더라. 




그러고 보니

귀여운 아이들을 만났을 때도,



섹시한 청년을 만났을 때도,



까만 개를 만났을 때도,



누런 개를 만났을 때도,



우리는 다른 듯 같았다.


.

.

.

.

.

.




사실 나도 먹방에 있어선 짜이 못지않다. 

짜이는 퉁퉁 부은 맨 얼굴로 하는 나의 먹방을 과하게 좋아한다. 옛날 얘기하듯 쿠바 얘기할 때마다, 다른 얘기를 하다가도 뜬금없이, 이런 사진을 보내온다. 귀엽다며 낄낄대고 "오구오구 잘 묵네" 하는 톡에서 전매특허의 애기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몇 번은 웃겨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안다. '얘가 나를 진심으로 귀여워 하고 있구나'를. 




나도 너의 이 모습이 진심으로 귀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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