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키미 Oct 17. 2018

늑대소년

재패니즈


말레꼰에선 호객 행위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배웠다. 그래서인가. 말하기 좋아하는 쿠바노들 안 그래도 어딜 가나 말 거는 통에 귀찮아 죽겠는데 말레꼰은 와, 진입부터 끝판왕 기운이 스멀스멀. '안 들려요' 모드로 카메라에 열중했다. 그런데 뷰 파인더 안에서 자꾸 웬 남자가 손을 흔든다. 너 찍는 거 아니거든? 사진 좀 망치지 말아 줄래? 하지는 못하고 어색 웃음 지으니까 더 들이대네. 촬영 포기. 돌아보니 짜이가 또 다른 남자와 함께다. 너 뭐하니? 남자가 살사 댄스를 가르쳐 준단다. 딱 봐도 호객 행위네! 저어기 가면 살사 클럽이 있는데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짜이가 얼마냐고 물어본다. 그걸 왜 물어? 끊지 못해 난감해서 웃는 짜이와 좋다고 따라 웃는 살사 가이의 끈질긴 구애. 아아주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게 이러다 또 말리게 생겼네.


그때다.

늑대소년이 나타난 건.


까사 시오마라에 묵는 일본인 게스트.

자주 라운지에서 마주친 그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 슬리퍼에 꾀죄죄한 티 쪼가리. 흡연 중이거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중이거나. 장기 여행자겠거니 해도 어디 나가는 걸 못 봤으니 묵는 게 아니라 사는 건가 싶을 정도.


어쨌거나, 잘 생겼다. 꽃거지 같달까.



"말을 할 줄은 아나?"

- 늑대소년 같지 않아요?

"왜, 말 가르쳐주고 싶어요?"

- 앜ㅋㅋㅋㅋㅋㅋㅋ


남녀 불문, 존재감이 분명하면 말 한마디 안 해도 주의를 끄는 법.


아까 초저녁에 웬일로 외출하는 늑대소년을 목격했다. 하얀 셔츠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에 1차 놀람, 내 옆을 스쳐갈 때 낯선 쿨내에 2차 놀람이 있었다. 쿠바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냄새가 향수 냄새임을 인지하기까진 로딩이 좀 걸렸다. 향수라니? 옷만 갈아입었지, 거지 같은 머리랑 수염이 영락없는 늑대소년인데.


아니나 다를까, 말레꼰에서 발견된 그는 또 스마트폰에 들어가 있었다.



그랬던 늑대소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Hey! Wassup!"


그는 짜이에게서 살사 가이를 빼앗아 가 요란한 인사를 나눴다. 친군가 보다.

백색 치아가 만개했다. ...웃을 줄도 알아? 신기한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는데 뭐라는지 둘은 신나게 대화한다. 말은 또 왜 이렇게 잘해? 그러더니 우릴 보고도 아는 체 한다. 왜 활발해? 어어.. 안녕..? 하하.. 우릴 아네? 하하..


이윽고 그의 말이 툭, 날아들었다. 우리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서는.


"Be Careful"


어...?

그리고 그는 살사 가이와 또 요란하게 인사하며 길 건너로 사라졌다. 쿨내나게.





"쟤 우리한테 조심하라고 한 거 맞지...?"

- 어.. 이 사람 진짜 사기꾼인가 봐 근데 쟤 뭐야.. 멋있게..


.

.

.


시오마라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더 이상 늑대소년이 아니었다. 잘 말하고 잘 듣고 자주 웃었다. 이름은 재키.


"쿠바리브레 마실래?"


럼과 콕을 사다 놓고 직접 제조해 먹는다고 한다. 솜씨가 훌륭하다. 수경이 밖에 나가 로컬 피자를 사 왔다. 또 재키가 나가 캔맥주를 사 왔다. 밤은 길고 대화는 무르익었다.


세계 여행 중이라는 재키는 도쿄에서 10년 가까이 광고 마케터로 일했단다. 사회생활 좀 해 보고 여행 꽤나 해 본 자 특유의 여유가 느껴진다. 내일 자메이카로 떠난다고, 아바나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깔끔하게 입은 거란다. 그런 거였구나. 도쿄 멋쟁이였을 모습이 상상된다.


"너희는 아바나 좋아?"
- 너무 좋아! 무엇보다 사람들이 너무너무 친절해 배려심이 넘쳐

"흠.. 그건 너희가 한국 여자라서야"

- 에? 뭔 소리야 ㅋㅋㅋㅋ


사뭇 진지한 그의 논리는 이랬다.

쿠바 포함, 외국 남자들이 기본적으로 동양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중 꼴찌는 중국 여자라고. 일본 여자와 한국 여자를 좋아하는데, 둘 중 꼽으라면 한국 여자가 1등이라고. 그리고 그건 일본에 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아니 왜? 남자들만 친절한 게 아니라 여자들도 우리한테 엄청 친절한 걸? 전부 동의할 순 없지만 일견 납득은 간다. '한국 여자'이기 때문에 받은 호의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느낌이 그렇다. 미인도 아닌데 이유 모를 친절을 갑자기 받아들이려니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르겠고요.


사실 재키의 논리에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다’일 뿐.



문득

그의 담배 케이스에 독특한 무늬가 눈에 띄었다.

'KARA JAPAN'이라고 적힌, 카밀리아* 굿즈였다.


"카라 팬이야?"

- 쉿 비밀이야


근거를 찾은 것도 같다.




* 카밀리아: 카라 팬클럽 이름



이전 18화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