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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May 11. 2021

3년 차 직장인에게 생긴 일

차마 담담하진 못했던, 그때 이야기


스물 아홉이 되었다. 3년 차 경력에 이르러 연봉은 2,500만 원에 도달한 평범한 직장인으로, 조금은 빠듯한 안정감으로 그런대로 살고 있었다.


연초마다 진행하는 연봉 협상은 별 의미가 없었다. 무의미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유의미하지도 않은 것이다. 인상이 되는 게 내 월급만은 아닌 탓이었다. 해마다 세금도, 물가도 따라 올라가니 사실상 제자리걸음인 셈이었다. 그나마 동결보다는 낫지 않냐며 스스로 위안은 삼지만, 더 이상 월급날이 설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포괄임금제로 야근수당도 제대로 못 받고 다닌다며, 불만은 늘 넘치지만 그럼에도 결국 집, 회사, 집 그리고 회사의 무한한 굴레 속에서 성실하게 굴렀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평소 나는 ‘스트레스성 소화 불량’을 달고 사는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약발도 안 받길래 포기했다. 안고 살기로 했다. 그게 내 운명이고, 그렇게 타고난 거겠거니 여기면서 말이다.


잔뜩 팽창한 듯한 뱃속이 구르륵거리면서 한 번 톡, 명치 부근을 찌르고 달아난다. 아주 불쾌하고 답답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화장실 한 번 갈 시간도 없이 바빴다. 핑계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실화다.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퇴근을 하면 꽤 괜찮아졌다. 그래서 결론냈다. 이건 병이다. 퇴근하면 낫는 병!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그런데도 유독 배가 아픈 게 심상찮긴 했으나, 소화가 조금 더 더럽게 안 되는 것뿐이겠지. 쉽고 만만하게 생각했다. 약발도 안 받지만, 일단 입 속에 집어 넣었다. 벗어날 수 없는 자리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뾰족한 바늘이 배를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명치가 울렁거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재빠르게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타이밍 좋게 구역질을 했다. 한참 변기에 기대 앉아, 가쁜 숨을 골랐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위험 신호가 울렸다.


죽은 듯이 지내던 감각에 본능이 불을 켰다.




갑작스러운 복통과 함께 단발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나는 거실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배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생소했다. 진짜 놀라면 소리도 못 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여기서 이렇게 정신을 잃나? 설마 죽나?'라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지만, 눈물은 났다. '출근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분명 오전 반차가 까일 게 분명했다.


나는 때마침 방에서 나오던 동생에게 발견이 되었다. 부축을 받으며 집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회사에 연락을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다. 마침 온몸도 경련이라도 온 듯 바르르 떨렸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한 시간 이십 분. 출근 마지노선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이미 돌이킬 수가 없다.


"장 기능은 떨어졌고, 이정도면 위도 멀쩡할 리가 없거든요. 소화 장애 수준인데, 도대체 어떻게 버텼어요?"


9시 되기 10분 전... 5분 전... 귀는 열려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출근 개망했다, 나 어떡하지?'로 가득 차있었다.


"네? 아..."

"내시경 한 번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시경 해본 적은 있어요?"

"아뇨..."

"꼭 받아 봐요. 그리고 내시경은 1년에 한 번씩은 꼭 하는 게 좋아요."

"아, 네네. 알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사수에게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대리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침에 갑작스럽게 복통이 심해서 급히 병원에...]


“언니, 오늘 그냥 쉬는 게 낫지 않아?”

"어?"


병원을 나와 다급히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나를 동생이 불러 세웠다. 답지 않은 걱정스러운 물음에 소름이 돋기도 전에 대답했다.


"안 돼, 쉬면. 큰일 나."

"언니, 너 지금 얼굴 엄청 창백해. 진짜 좀 아닌 거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사실 괜찮지는 않았다. 머리부터인지 이마부터인지 땀 한 줄, 한 줄이 흘러내리는 느낌도 생경했다.


"아니, 제정신이 아닌데 뭐 하루도 못 쉬냐? 존나 미쳤네."


짜증내는 동생을 뒤로 하고 휘휘 손을 내저었다. 나름대로 고마움을 담아 봤지만, 동생은 영 못마땅한 듯 욕을 퍼부었다. "그래, 뒤지시든가."라던가. 나라고 애사심이 펄펄 끓어서 움직이는 건 아닌데 말이다.


이 모든 건 내일의 나, 그리고 다다음 날의 나... 모든 날의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야근과의 전쟁을 연일 치르며 일상 복귀에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안일한 대처에 대한 대가는 살벌한 후폭풍으로 쏟아졌다. 또 한 번 반복된 구역질에 급한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내시경 받아야 할 거 같아."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이와중에도 그까짓 병원 하나 알아보고 예약 전화할 시간이 없어서 엄마에게 도움 요청을 한 이 상황이 너무도 멍청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마치 기다렸단 듯 이미 알아둔 곳이 있다며, '주말이 제일 좋겠지?'라고 되물었다.


"응.."


왠지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시경 검사는 정말 최악이다! 이렇게 발전한 세상에 아직도 500ml 용량에 이르는 물약을 냅다 속에 부어 넣어야 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니,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수차례 헛구역질을 하며, 기어코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이게 지금 다 헐어서 이런 거예요."


모니터 두 대에 각각 위와 대장 사진이 띄워졌다. 발갛다고 알고 있는 속엣 것이 왜 이렇게 하얗지? 싶었는데, 의사 말로는 다 헐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시면, 군데군데 새빨갛게 상처가 있죠? 내시경 하면서 자잘한 용종들은 제거했고, 이게 그 자리예요. 자연스럽게 아물 거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 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이게 그, 대장인데 여기서 선종이 하나 발견돼서...”

"선종이요?"


웬 괴상한 독버섯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못난 딸기같기도 한 게 묘한 생김새였다. 처음 보는 형태라 정체는 불명하지만 딱 하나 분명한 건 뿌리 한 번 참 튼튼하게 박아놨단 것이다. 의사는 그것의 이름이 선종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종은 내시경으로 제거할 수가 없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조직검사는 넘겼으니까 결과가 나오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거고요. 이거는 이제, 일주일 정도 걸리니까 기다리면 됩니다. 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이가 워낙 젊고 하니까."


그렇다고 한들 사람 마음이 마음처럼 되나. 물론, 안 된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아마도 2일이 더 지났을 무렵까지 나는 백지 상태나 다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무얼 했는지 금새 까먹을 정도로 초긴장 상태였다. 선종...? 어떻게 그런 게 내 몸 속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지? 여전히 떨치지 못한 걱정과 불안, 의문과 함께.


생각보다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기다리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3일 뒤,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암세포라는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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