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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Apr 13. 2024

얘, 너 강사님한테 강습 안 받니?

수영, 그 깊은 수심에 대하여


추석 연휴가 성큼 며칠 전으로 다가왔다. 연휴를 준비하며 들고 나는 사람들로 수영장은 어수선하면서도 고요했다. 확연히 줄어든 사람들 틈에서 나는 평소보다 여유롭게 수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다.


"돈 가져왔니? 만 원만 주면 돼."

".. 네?"


거두절미 없이 훅 들어온 갑작스러운 돈 이야기에 놀라 되물었다.


"그저께 얘기했잖아. 이거 많이 봐준 건데."

새삼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저께? 무슨 이야기? 아,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같은 레인 사람들끼리 가볍게 스몰톡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틈에 상급 레인에서 떡값을 걷는다며 한 사람당 만 원씩 내라던 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응? 뭐가? 아, 깜빡했어?"

"네, 그런데 저희 레인은 어차피 돈 안 걷을 거라서요."

"뭐라고?"

"하고 싶은 사람들만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어요."


상대는 의뭉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래서 아무도 안 낸다는 거야?"

"네네. 걷지도 않을 거고요."

"얘, 너 강사님한테 강습 안 받니?"


놀라기보다는 그 물음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탈의실 문을 닫았다. 조금 더 의견을 확실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죠. 강습비 냈으니까."

당연한 대답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건가, 그동안 한 번도 안 냈었니?"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긴 했는데, 앞으로도 낼 생각 없습니다."


딱 잘라 돈 낼 생각 없다고 대답한 뒤 샤워실로 향했다.


내가 속한 레인은 초급반 중에서도 나잇대가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나 잠시 휴학 중인 대학생들, 사회초년생, 직장인 등... 그래서 '떡값'이란 문화가 굉장히 낯설었다. 대학생 친구들은 그게 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누군가에게는 적지 않게 생소한 문화이기도 했던 셈이다.


처음 수영을 시작했던 작년 초, 첫날 대뜸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시간에 초급반 진행 안 하니까 시간을 옮기지 그래"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고급반 강사가 새로 온 수강생인 나에게 기본 호흡법과 자세 하나를 잠깐 알려주고 간 일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 강사가 고급반 담당인 줄도 몰랐던 나는 대뜸 옷 갈아입다가 시간대 옮기라는 협박성의 어조를 마주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데스크에서 배정해 준 초급반 시간대로 들어온 건데요, 저도."

"데스크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초급반이 있었어? 어휴, 뭐야 이게."


곧장 대꾸하니,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데스크가 일을 똑바로 하네, 못하네 그런 말들이었다.


"이 시간에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보니까 수영 아예 처음인 것 같던데, 수준 맞는 시간대로 다시 잡아달라고 데스크에 말해보라는 거지."

"아뇨, 저도 제 일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이 시간이 맞아서 들어온 건데요. 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바꾼다는 건 제가 어려울 것 같네요."


대답을 마치자마자 몇몇 분들이 나를 두둔해 주셨다.


"아니, 도대체 어린 아한테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네. 초급반이 없기는 왜 없어! 초급반이 오늘 바빠서 고급반 강사님이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는 호흡법 그거 쪼매 가르쳐준 거를 갖다가 아주 잡아먹네, 잡아먹어. 왜들 그래, 진짜! 창피하게 좀, 그러지들 말어."


똥은 더러우니 피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전설로만 들어오던 수영장 텃세를 몸소 겪으니 황당함을 떠나서 신기하기도 했다. 진짜구나, 이게.


수업 한 텀이 끝나면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우르르 몰리기 때문에 샤워실에 조금 늦게 들어가면 당연히 자리가 없기 마련이다. 이때, 자리를 오랜 시간 내주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먼저 쓰고 있는 경우엔 몸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도리어 자리를 쓰고 있는 나를 밀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양해라도 짧게나마 구하면 그것은 보통 양반이다. 그냥 더 말 섞지 않고 빨리 샤워를 끝내고 공간을 벗어나는 게 최선이자 현명한 방법이다.


지나가면 쑥덕거리는 작고 작게 모이는 큰 말들도 신경 끄면 그만이다. 관심을 안 주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나는 이 같은 상황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별개로 초급반에서 만난 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사실 즐거운 게 더 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는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 다니다 보니, 그 많던 텃세는 모르는 사이에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죽지도 않고 그 못된 관습은 때가 되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곧 스승의 날인 거 알지? 이번 주까지 다들 만 원씩만 내."


당연히 내지 않았다. 나도, 초급반 친구들도. 처음 그 말을 듣자마자 너도나도 보였던 반응은 대부분 '헐, 대박. 말로만 듣던 건데, 진짜 하는 거였네'였다. 더 어린 친구들은 '왜, 왜 돈 달라는 거예요?' 근본적인 물음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이후의 떡값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떡값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니까. 우리들의 인식은 그게 당연했다.


초급 레인에서 도무지 돈이 나올 기색이 없으니, 결국 우리 중 가장 연장자로 있던 친구가 모르는 사이에 불려 가 한 소리를 들었단다.


"이러다간 너네들 다 안 낼 거 같으니까, 나보고 대표로 총대 매고 걷어 오라는 거야..."


난감해하면서 말을 꺼내는 이 사람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듣고 있던 다른 이들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결론은 이러했다.


내고 싶은 사람만 내자.

돈을 강제로 뺏는 건 삥 뜯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기꺼이 내고 싶어서 낸다는 사람들은 무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수도 아닌 항목에 따르지 않는다고, 강제로 집행하겠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 원 내면 귀찮게 안 하려나."

"아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만 원을 왜 내야 하는지 모르겠어..."


불만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설, 추석, 스승의 날, 생일... 돈을 걷어가는 명분은 다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꿋꿋하게 돈내기를 거부했다. 이후로 나를 향한 묘한 눈초리들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런 걸로 마음이 불편하진 않아서 만 원을 낼 이유가 더더욱 없었다.


지치지도 않고 돌아온 추석 기념 수금에 초급반 총대는 다름 아닌 내가 되었다. 그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모두 일상으로의 복귀를 이유로 떠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중엔 저녁 직장인반으로 옮겨간 이도 있었다. 이상한 떡값 강요가 없어서 쾌적하고 좋다던데, 나는 저녁반이 힘들어서 오전 초급반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초급반 인원은 대거 세 바탕씩 바뀐 마당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폭탄, 수금 총대였다. 누가 무슨 이유로 쥐여주는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수금하는 총괄 담당자가 '이번엔 네가 책임지고 네 레인 애들 돈 다 걷어 와'하면 총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안 내며 거부하고 불매를 해도, 매 기념일마다 찾아오는 게 오죽 끈질기기도 하다.


"말만 전달까진 해볼..."

"전달 말고, 걷어오라니까."

"전달만 하겠습니다."


마치 지치지 않는 창과 방패 같기도 하다.


"아무튼 다 걷어서 나한테 가져오면 된다?"

"아뇨, 저는 전달만 할 거예요."


내 말에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 떠나버렸다. 수업 내내 잦은 텀으로 지켜보는 다수의 눈빛이 내 몸을 콕콕 찔렀다. 그런다고 돈을 걷을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진즉 순종했겠지. 저들도, 나도 참 포기는 모르는 사람들 같다.


또 한 번 수업을 마치고, 레인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아예 전달하지 않고, 모르는 채로 두면 일이 더 꼬이고 괜히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내 방식대로 전달까지만 하기로 했다.


"추석이라고 떡값 내라는데, 저보고 걷어오라고 하시거든요. 근데 저는 돈을 걷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한테 걷을 생각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분들만 각자 알아서 하시고요, 저한테 낼 필요 같은 건 없어요."


다들 이해했다며 전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각자 헤어졌다.


"돈 가져왔어? 오늘은 줘야 하는데."

"아뇨. 저희 레인에서는 내고 싶은 분들만 따로 내는 걸로 얘기했어요."

"거기 너희 레인 애들 다 같은 생각이야?"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고, 감사하게도 동의해 주셨어요."


그렇게 나는 강습비 외에 다른 떡값은 이사로 인해 떠나게 된 직전까지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수영도 잘만 다녔으며, 그 안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수영을 그만두고서도 종종 생존 신고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 


난생처음 받아본 감사함의 강요는 확실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성의 표시를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스승에 대한 감사함도 모른다고 하는데, '제가 몰라서 배우려고 하는데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그 의미로 내는 것이 강습비가 아니었던가. 소정의 선물을 주고 싶을 정도로 감사하다면, 그건 그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하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원치 않는 누군가의 돈을 강요해서 뺏듯이 더해서 만든 선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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