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가 무명

짧은 여행

by 김영

조금 지쳤다. 아니 많이 지쳐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머릿속을 메우면서 스트레스 수치가 늘어났다. (재어 본건 아니지만 그럴 것 같았다) 늘 가던 산책길이 마치 트랙처럼 느껴졌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떠날 수 없었다. 앞산에 보이는 나무들. 길게 뻗은 검은 가지 위로 남은 은빛 낙엽들. 그게 더 보고 싶었다. 산책길을 벗어나 산에 올랐다. 그 입구에는 농사를 짓는 농가가 있었다. 주택가 사이에 덩그러니 한 느낌. 그곳을 지나면 늘 우리에 갇힌 개 두 마리가 짖어댔다. 사람의 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녀석들에게 손과 몸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뇽! 하지만 인사가 무색하게 짖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발상 전환이 일어났다. 녀석들이 어쩌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여기요! 한번 봐줘요! 저 여기 있어요! 사나운 으르렁 거림 사이에서 잠깐 그 느낌이 스쳤다. 용기 내 다가갔다. 더 심하게 짖었다. 난 또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좀처럼 짖기를 멈추지 않던 녀석들 때문에 그곳에 주인이 나왔다. 내게 누구냐고 묻길래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나가는 사람인데 개들 좀 보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별놈 다 있다는 표정이었다. 얘네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렇게 녀석들의 이름을 알아냈고 내가 자신들을 돌보는 주인과 잠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음성을 듣고는 경계의 태도가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손을 내밀자 한 녀석이 냄새를 맡기 위해 다가왔고 난 조심스럽게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알았다. 녀석들은 정말로 날 불렀다는 것을. 다른 한 녀석은 그 주변을 오가며 간헐적으로 짖었다. 목덜미를 쓰다듬자 내 손에 얼굴은 기대는 녀석. 아 얼마나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으면... 맘껏 쓰다듬어 주었다. 내 냄새를 맡도록, 핥도록 그렇게 손을 내주었다.


경계를 풀지 못하는 나머지 녀석은 친구가 하는 행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 속에서 정신없이 오갔다. 그리고 한참 그러고 있는데 내 손에 기대던 녀석도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돼. 이 정도 친해졌으면 다음엔 더 친해질 수 있으니까. 녀석들에게 크게 손을 흔들고 안녕이라고 했다. 엉아 또 올게.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어르신들은 아닐지...)


그렇게 얕은 산을 걸으면서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벌써 그리워진 녀석들 때문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입구를 지날 때 또 녀석들은 짖었지만 이제는 나를 알아보는 그 짖어댐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햇살이 맑게 비춘 주택가. 아직 해를 받지 못한 곳에는 서리가 끼어 있었다. 주차된 차 유리에 서린 하얀 결정체. 거기에 괜히 웃음표시를 하나 그렸다. 그리고 오늘도 행복하세요라고 썼다. 뜨거워진 손 때문에 글씨가 선명했다. 다른 차 유리에도 썼다. 하늘을 한번 봐요.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당신은 최고. 그렇게 주차된 차들에 문장을 적고 나자 풍경이 달라졌다.(이것이 문장의 힘이라니..) 집에 돌아오는 길, 매일 지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놀랍도록 맛있었다. 그건 선물 같았다. 해는 더 높이 떴고 결국 유리에 새겨진 문장은 증발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막 여행에서 돌아온 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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