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광 Jan 08. 2021

감성충 전성시대

제가 어린 시절에는 영화관에서 애로물을 많이 상영했습니다. 아무래도 적은 예산으로 흥행을 얻으려고 하다보니 말초적 욕망을 자극 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1975년에 "영자의 전성시대"가 나와서 큰 히트를 쳤고 제가 대학생 시절에도 "애마 부인" 같은게 흥행에 성공했으니 80대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의 수준은 많이 높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위의 영화들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짧은 시기동안 지금의 한국 영화는 엄청난 발전을 한 셈입니다. 그런 저질 애로물은 이제 영화시장에서 사라지고 그 보다는 다양한 컨탠츠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뛰어난 수준의 한국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과거의 열악한 영화시장에서 벋어나 지금은 영화 컨탠츠 산업의 시장도 엄청 커졌고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에 많이 근접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왜 이렇게 좋은 영화들을 만들수 없었을까요? 과연 예산이 적고 영화산업이 영세해서인게 원인일까요? 돈이 없으니 당장 자극적인 영화를 찍어서 돈을 버는게 급했다는게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영화 감독이나 배우의 역량이 떨어지는데 흥행의 실패를 감수할 용기가 없으니 일차적 욕망에 호소하는 영화를 찍은 것입니다. 실제로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의 능력이 뛰어나면 적은 예산으로도 좋은 영화를 찍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제작자들이 그런 힘들고 좁은 길을 가기 보다는 넓고 쉬운 길을 찾은 것입니다. 물론 시대적 한계와 시장의 문제도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서는 사전 검열이 있었으니 사회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어려웠던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시장의 측면에서는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말초적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아무리 작품성 높은 영화를 만들더라도 흥행에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컨탠츠 산업은 당시의 환경적 요인, 즉 시장의 수요를 반영하는 형태로 자라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초적 자극을 원하는 수요가 많은 시절에는 그런 수요에 부합하는 영화가 많을 것입니다. 엄청 야하거나, 엄청 슬프거나, 엄청 무섭거나, 엄청 웃기거나 하는 방식의 감정의 극단을 추구하는 영화가 많던 시절에서 지금은 그보다는 훨씬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영화가 많아진 것은 그만큼 일반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 일차원적인 감정을 추구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고 좀더 묵직한 질문을 던지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함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거나 우리의 삶을 좀더 관조할수 있는 능력이 키워지게 된 것입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영화 관람을 통해서도 이루어 질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


사실 영화 뿐만 아니라 뉴스나 출판 매체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영화에 비해서는 발전 속도가 느린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화는 잘만 만들면 세계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으니 국제적인 수준의 작품이 나오는데 뉴스나 도서 출판 등은 국내용이라서 그런지 아직 수준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문학은 세계의 인문학 도서에 비해 많이 수준이 떨어집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컨탠츠의 큰 특징은 아직 감정을 소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는 1980년대의 한국 영화시장처럼 아직도 일차원적인 감정을 소비하는 것인데 저는 이를 "감정 포르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개천에서 용나기도 힘들고 노력을 통해 성공하는게 더 어려워졌기에 이런 자위용 컨탠츠 수요가 오히려 늘어난 것입니다. 이런 감정 포르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속칭 "감성충"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의 현실에 우울한 면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탕발림 위로나 울컥함을 통해서 내 감정을 소비하는 방식의 1차적인 흥분에만 머물러 있는다면 그것은 애로영화를 관람하며 말초적 자극을 즐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현상이 보편화된 것은 몸에 나쁜줄 알면서도 술에 취해 살수 밖에 없는 어느 육체 노동자의 우울한 현실처럼 이해해 줄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유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개인 단위에서 아무런 각성이나 내적 성찰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비겁한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조장하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는 것은,  과거 한국의 애로영화 제작자들이 그 당시의 시장 구조 덕택에 많았던 것처럼, 지금 한국사회에 있는 수많은 감정소비 시장의 수요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음모론자들이나 선동가들에게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지만 그들의 숙주 역할을 하고 있는 수많은 감성충 역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감정에 취해 어떤 사건에서 타인을 비판하기만 하고 그 사건에 숨어있는 나의 악마성을 직시하지 않거나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술에 취해 살면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처럼 건강한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 삶에 아무런 실질적 개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분명 중요한 것이고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에너지를 얻고 행동을 하게 되는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런 단순한 감정적 유혹을 이겨내고 한단계 넘어서는 승리의 경험을 통해 한단계 발전할 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는 감정에 기반한 감성충 전성시대에서 이성에 기반한 건강한 합리주의자의 시대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아 도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