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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광 Apr 05. 2021

차별과 데이터

통계학의 초창기 역사에는 우생학자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우생학이라는 것은 사람 중에서도 우열한 종자와 열등한 종자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걸 체계적으로 연구하던 학문 분야인데요, 창조 과학처럼 사실 학문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믿음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cherry-picking 한 분야이라 과학이라기 부르기 어렵습니다. 그런 과학적 기반의 허술함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지식들이 잘못 유통되어질때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찌의 인종 청소를 불러일으킨 역사적 비극에도 사실 이러한 우생학적 뿌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철학의 자연주의적 오류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상이 당위를 설명한다는 사고인데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 현실을 정당화 하는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살인이나 강간 같은 강력 범죄가 많이 일으키는 범죄자가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통이라고 해서 그걸 바탕으로 인종차별적인 행정조치를 취한다면 그게 용납될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행정 효율의 가치가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민주국가라면 인권을 희생해서 이룰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입사후 업무 적응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성별로 입사 점수에 차이를 준다면 그게 합당하겠습니까? 그게 설령 충분히 많은 데이터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해석하는데에는 매우 신중한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데이터와 통계가 차별과 감시의 수단이 될수 있다는 것은 현실문제에서 적용할때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요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생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부작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데이터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만능주의, 즉 과학으로 무엇이든 다 밝혀낼수 있다는 믿음이, 사실은 오만인 것입니다. 데이터의 한계로인해 충분한 인과관계를 밝힐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데이터가 충분히 얻어지면 인과관계를 밝힐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이 오남용을 키우고 차별과 폭력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반지성 주의가 심해서 오히려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우려는 없는 편이지만 데이터를 들이대면서 타인의 생각을 억압하고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종종 목격됩니다.


한 가지 예로는 최근 한국의 집값 상승으로 인한 청년들의 좌절과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 해외의 부동산 자료를 가져와서 집값이 오른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니 정부 책임은 아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저는 한국의 주택통계 산정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설령 그 통계가 맞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무능이나 무주택자의 좌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이라면 한국이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양극화가 개선되었습니다. 분명 통계청 공식발표에 의하면 그 당시 지니계수는 이명박 정권 시절에 낮아졌으니 빈부격차가 해소되는 중이라고 해석할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쓰레기 통계를 들이대면서 입닥치라고 하는것이 바로 폭력입니다. (실제로 박근혜와 문재인이 대선후보로 토론할때 박근혜 후보가 통계청 지니계수 상으로 문제없는데 왜 불평등이 심해졌다고 하느냐며 오히려 문재인 후보를 몰아붙혔습니다)  


소주를 맥주 글라스 반잔에 부어서 완샷을 해도 대부분은 괜찮다는 이유가 지금 내가  잔을 완샷해야 하는 이유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통계를 들이대면서 타인에게 본인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취할 태도는 아닙니다. 통계를 통해 타인의 생각의 자유를 억압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통계를 조작하고 싶은 욕구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1970년대  소련은 붕괴되기 전까지 통계상으로는 매년 엄청난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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