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8)

by 김재광

2007년은 좀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한다. 일단 나는 그해 초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을 했고 2006년에 통계학의 4대 톱저널에 모두 논문이 실리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서 많은 분들이 주목하셨는데 그 중에는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칼톤 대학의 Rao 교수와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학과장 쾰러 교수가 있었다. Rao 교수는 내게 비행기값과 숙박비 일체를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초청을 하셨고 아이오와 학과장 쾰러 교수는 내게 아이오와 주립대학으로 교수 지원을 할 생각이 없는지 문의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연세대가 명예와 즐거움이 보장되는 대한민국 최고의 직장이라고 생각했었고 굳이 미국으로 갈 생각이 없었기에 정중히 사양을 했었다.


내가 1968년 생이니 2007년에는 한국 나이로 나이 40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그당시 나는 나이 40이 된다는게 엄청 심란한 일로 느껴졌다. 이제는 더이상 젊다고 할수 없는 나이이고 완연한 중년에 접어드는데 그에 걸맞는 인생에 대한 깊이와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고 또한 계속 이렇게 사는게 최선일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 당시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마흔즈음에"로 바꿔서 부르기 일수였는데 그래도 마음 한켵에 있는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름에는 Rao (라오)교수의 초청으로 온가족을 데리고 캐나다 오타와에서 지냈다. 가구가 있는 furnished apartment 를 두달간 빌려서 지냈는데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라오 교수는 샘플링의 대가인데 풀러 교수와 쌍벽을 이루시는 분이었다. 나는 풀러 교수의 제자이자 라오 교수와도 연구를 했으니 샘플링 분야의 대가와는 다 호흡을 맞춘 셈이다. 라오 교수는 풀러 교수와는 좀 스타일이 달랐다. 인도 출신이라 그런지 동양적인 정서가 있어서 나와는 오히려 더 잘 맞았다. 풀러 교수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인데 라오 교수는 남 뒷담화 하는것도 좋아하고 흥분도 잘하고 재미있었다. 두시간 미팅을 하면 한시간 반은 수다를 떨고 나머지 삼십분만 공부 관련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워낙 빨리 돌아가서 내가 조금만 설명해도 금방 이해하시고 핵심을 짚어 주셨다.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 아닐수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는 아무와도 이야기가 통하지가 않았는데 이렇게 공부 관련 이야기를 할수 있는 사람을 만날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한달 정도 같이 미팅을 하면서 연구 관련 토론을 하다보니 라오 교수가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넘사벽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인간이고 내가 절대 뛰어넘을수 없는 경지에 있는 분이 아니라 어떤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과 그렇기에 나 역시 열심히 하면 라오 교수 근처에는 갈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한국에 계속 있으면 분명 안주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라오 교수처럼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미래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미국으로 나와서 아이오와 같은 곳에서 조용히 연구를 하면서 나 자신을 꾸준히 성장시키면 그건 하나의 가능한 미래로 될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이라는게 강낭콩 씨앗을 심은 것처럼 한번 심고나니 조금씩 싹을 티우고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20170802_122728.jpg

(예전에 학회에서 찍은 사진. 라오 교수와 풀러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국 생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