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에 학교에서 2 키로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집을 구해서 구매 계약을 했다. 에임스 북서쪽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35만불짜리 집인데 10만불 정도 다운페이를 하고 나머지를 모기지 론을 얻어서 샀다. 다행히 그 당시 금융위기가 와서 집값이 조금 떨어진 상태여서 괜찮은 집을 저렴한 가격에 사게 되었다. 방이 6개이고 화장실이 4개인 2층짜리 목조 단독주택이었는데 제법 넓고 괜찮았다. 한국에서 살았으면 수십억짜리 집이었을텐데 단돈 한화 4억 이하에 사게된 것이다. 처음에 6개월 정도는 동네가 너무 조용하고 집이 너무 좋아서 강원도 평창의 빌라식 콘도에 놀러온 느낌이 들었다.
차도 하나 장만했다. 혼다에서 나온 오디세이라는 밴이었는데 장거리 여행이라도 할려면 밴이 좋을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차가 너무 좋아서 아이들이 밴에 들어갈때 신발을 벗고 타곤 했었는데 한달 정도 지나니까 지저분해졌다. 다음해에 부모님이 오셔서 그 밴에 온가족이 타고 시카고 여행을 갔는데 그때 아이 할아버지가 무척 흡족해 하셨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은 8월 말 가을학기부터 학교를 다녔다. 첫째는 4학년, 둘째는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미국은 가을학기가 신학기이니까 둘째는 1학년 입학이 된 것이다. 첫날에 학교 데려갈때는 아이들이 차 안에서 10분 넘게 엉엉 울었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다짜고짜 미국 학교에 데리고 가니 본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달 정도 지나니 첫째 아이는 미국학교가 한국학교보다 좋다고 하면서 자기는 이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나 역시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부교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개강 직전 교수 오리엔테이션을 했었는데 그곳에 다행히 한국인 신임교수가 나포함 5명 있어서 반가왔다. 화학과에 있는 이영진 교수는 나와 동갑이고 대학 동문이어서 더욱 반가왔고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낸다. 이곳에서는 학과 강의 부담이 1년에 3과목이었는데 샘플링 연구소에서 1개를 buyout 해 주었고 학과장님이 배려해 주어서 1개는 신임교수 적응을 위해 면제를 해주어서 첫 2년간은 1년에 1과목만 강의를 했다. 엄청나게 낮은 강의 부담인 것이다. 그래서 첫학기는 강의가 없이 지냈는데 그래도 부담이 되었다.
어쨋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니 나는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최선의 생활을 할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바쁘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아이오와에서 조용히 지내니 가끔씩 한국에서 지냈던 6년 반의 일들을 회상하게 되었다. 즐거웠던 기억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기억들도 있었고, 후회되는 일들도 있었고 또 상처받은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지나간 사건이고 돌이킬수 없는 일이니 이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좀더 심취하게 되었고 "용서"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