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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광 Dec 17. 2020

버림의 미학

어제는 우연치않게 제 공부방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딸내미가 우리 집에 있는 제 공부방을 접수하게 되어서 부득이하게 제 공부방에 있던 책들과 온갖 자료들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저널이 몇박스 있었는데 그건 한국에서 이사올때 가져온 것으로 아직까지 박스도 띁지 않은 상태여서 이번에 버렸습니다. 제가 박사과정 시절에 들었던 수업들의 강의노트와 연구노트도 다 버렸습니다. 책도 200권 가까이 있었는데 꼭 필요한 책을 50권 정도 남겨 놓고 나머지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욕심이 있는 편이어서 그동안은 책을 사모기만 했었지 버린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버려 보니 어떤 책은 유행이 지나고 지식이 업데이트 되어서 구닥다리 지식으로 가득차서 버린 것도 있었고 어떤 책은 필요할듯 해서 사둔 책인데 사놓고 한번도 보지 않은 책이라 버렸습니다. 전공 책들은 연구를 하다가 필요할때 찾아볼 때도 종종 있는데 그런 참고서적으로도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책은 앞으로도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발전속도도 빨라서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낡은 지식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웬만한 내용들은 인터넷이나 디지털 서적으로 얻을수 있기에 예전처럼 책의 중요성이 크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을 버리고 나니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과거의 지식을 벋어나서 이제는 좀더 자유롭고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을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제학자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통에서 과감히 벋어나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파괴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얻어낼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려 말에 이성계가 이씨 조선을 세우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것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개혁의 기본 원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수도를 옮기지 않고 개성의 고려왕궁에서 그대로 조선왕조를 만들려고 했다면 아마도 조선 개국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파괴하는 작업을 수반해야 했던 것처럼 어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과거로부터의 단절이 필요한데 그것은 과거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이 있어야 병충해가 죽고 땅이 단단해져서 다음해 농사가 잘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혁신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될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기에 그들은 과거 전통에서 보다 자유로울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민이라는 선택을 할때 모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많은걸 버려야 했지만 그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개척자 정신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본 정신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제 제 전공을 조금 바꾸어서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 하던 참에 우연한 계기로 낡은 전공책을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 학문세계의 "창조적 파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 전공책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과거의 경로의존성을 버리지 못하고 예전부터 하던걸 계속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버림의 미학은 그 버림을 통해서 비로서 새로운 것을 채울수 있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옛사랑을 잊어야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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