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21
또다시 밀려버린 일기ㅠㅠ 가만 보니 집에서 노는 날에는 글도 안 쓰고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저냥 시간 보내서 그런가 딱히 하는 건 없는데 계속 왔다 갔다 이것저것 엄청 부산하게 보내긴 하는데.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들이 내 휴식시간 훔쳐가는 것 마냥 시간이 줄줄줄줄 샌다. 암튼 정신 차리고 다시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아무튼 매번 정신줄 놓았다가 다시 시작할 때 나는 손톱을 깎는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지만 둥글둥글해진 손과 발을 보며 기분도 산뜻해진다. 내가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도 손톱은 꾸준히 자라고 내가 아무리 할 일 없고 심심하게 살아도 손톱은 꾸준히 자라고 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멈추지 않고 매 순간순간 내 몸은 나를 위해 그렇게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 나 의식하지 않아도 쉬는 숨, 아무리 다듬어도 또 자라는 눈썹, 아무리 고데기를 해도 한쪽으로 솟는 머리. 모두 다 나의 모습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씩 깔끔하게 정돈해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고 나서 로봇 청소기 먼지통을 비우고 필터를 세척하고 샤워실에 곰팡이 제거제도 바르고 세면대 물때도 제거하고 설거지하며 싱크대도 닦고 정수기도 닦고. 작은 집이라도 이곳저곳 손보며 때 빼고 광내고 한다. 별로 티는 안 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정갈해지는 모습이 구석구석 내 눈에는 보인다. 마음이 상쾌하다.
예전에 자취를 꿈꾸며 살림에 꼭 필요한 전자제품 리스트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 냉장고 (+정수기)
- 에어컨 (+공기청정기 +제습기)
- 세탁기+건조기
- 식기세척기
- 로봇청소기
이 정도만 있으면 어디서든 편하게 살 거 같다. 나중에 우리가 이사 가게 되면 그 집에는 꼭 식기세척기가 설치되어 있으면 좋겠다. 설거지 시간만 단축되면 엄청나게 편할 것 같은 느낌! 세탁기랑 건조기도 집안에 있으면 좋을 텐데 ㅎㅎ 로봇청소기는 지금도 너무 잘 쓰고 있고 이사하면 새 상품으로 구매하고 싶다. 요리 관련 전자기기는 남편이 바라는 걸 사야 한다. 어차피 나는 안으니까 ㅠㅠ 괜히 사다 놓고 애물단지만 돼버림.
곧 블랙프라이데이가 다가오면서 뭔가 사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려고 한다 ㅋㅋ 딱히 필요한 건 없는데 자꾸 인터넷에 올라오는 광고를 보며 ㅠㅠ 이것저것 살까 말까 잡생각이 가득가득. 하지만 30년 동안의 내 소비패턴으로 보아 잔뜩 사다 놓고 금방 질려하며 또 죄다 갖다 버리고 또 사고 또 버리고를 반복해와서... 뭘 사던 비우게 되는 미래가 눈에 선하다ㅠ
그러고 보니 옛날에 심심하다고 내 사이즈에 딱 맞는 원피스 만든다고 재봉틀 사서 잠깐 배우고 누구 주고ㅠㅠ 그림 그린다고 캔버스 사서 조금 깔짝 하다가 하나 완성하고 비우고 ㅜㅜ 음식 한다고 이것저것 프라이팬이며 에어프라이어며 계란찜 용기며 사다 놓고 한 번 하고 말고 ㅋㅋㅋ 옷도 굳이 굳이 미국에서 쇼핑한다고 사서 몇 번 입고 이건 아니구나 깨닫고 오피스룩 잔뜩 사다 놓고 비우고 운동복 잔뜩 사다 놓고 비우고 가방도 사서 무겁다고 비우고 구두도 발 아프다고 비우고 ㅠㅠ 후 하지만 정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야지 좀 쓰려고 돈 버는데 ㅋㅋㅋ
다이어리라도 꾸밀까 해도 나는 꾸미는데 소질이 없고... 고등학교때 배웠던 목공을 해서 맞춤가구를 만들고 싶기도 하고 ㅠㅠ 근데 가구 놓을 데가 없으니까. 도자기도 배웠는데 그건 도자기를 구워야하니까 흠. 자수라도 놓아야하나 옛날 사람들이 자수 열심히 놓은게 심심해서 그런가.
그나마 취미(?)로 열심히 가장 길게 집중했던 게 글쓰기였다. 돈도 안 들고 꾸준히 쓰기만 하면 되니까 아주 좋음 근데 좀 심심하다 뭔가 소통하고 싶은데 혼잣말하는 기분 ㅠㅠ 그나마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한국어로 뭐라 쓰기라도 하니 상당히 위안은 된다만 ㅠㅠ
한 해가 또 이렇게 지나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민 온 지도 벌써 3년 반이 다돼가고 한 직장에서 일한 지 2년 반이 다돼가고ㅜㅜ 지금의 삶이 참 좋은데도 왠지 모르게 뭔가 권태기인가 싶다. 자꾸 딴 곳을 기웃거리고 딴짓을 하고 한눈을 판다. 이곳에서의 삶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임시로 몇 년만 머무는 것이었는데 ㅠㅠ 벌써 몇 년째...
그나마 이민자들에게도 호의적이고 차별도 없는 곳이라 정말 좋은데, 사실 나쁠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다. 그냥 처음에 이곳에 올 때부터 잠깐만 살 것이라 기대하고 이것저것 맘에 안 드는 것들도 어차피 임시니까 하는 생각에 넘어갔던 것들이 임시가 아니게 되고 잠깐이 아니게 되어 더욱 견디기 힘든 것 같다.
근데 또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홍콩에서도 다 똑같이 살았다. 지금 내 삶이 내가 한국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별로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옛날에도 회사 -> 집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했었다. 그때도 딱히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때도 그냥 심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ㅋㅋ
그런데 그때는 내가 선택해서 그곳에서 살았었고 내가 선택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과 함께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내 맘대로 못해서 더 답답한 것 같다. 나는 다른 곳으로 나아갈 준비가 진작에 되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더 힘든 것 같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더 갇혀있는 느낌이 든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자꾸 미뤄지는 환경이 언제든 끝이 있긴 한 걸까 하는 느낌. 남편을 원망하고 싶지만 또 남편 잘못은 아니라서 그냥 내 속만 상한 느낌.
물론 끝은 있다. 의욕이 앞서 빡빡하게 계획하면 당연히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냥 천천히 여유 있게 현재를 즐기며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다신 안 올 현재이지 않는가? 내가 또 언제 여기서 살아볼까? 그렇게 위안할 수야 있겠지만 어느 날은 갑자기 또 지겹고 지겨운 이 생활이 견디기가 힘들다.
뭔가 변화를 주고 싶지만 그것도 사실 한정적이다...ㅜㅜ 그래서 자꾸 쇼핑이라도 하고 싶어지나 보다. 마음이 텅텅 머리도 텅텅 뭔가 즉각적인 만족을 갈구하다가도 그게 어차피 내 허한 속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 더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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