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2월 19일, 카메하메하 5세 Kamehameha V 의 도움으로 새로운 정부 청사의 초석이 Lodge Le Progres de l’Oceanie (태평양 섬 국가 연합, 우애단체) 에 의해 놓였다.
7년 후, 같은 단체는 이올라니 궁전 Iolani Palace 의 초석을 놓았다.
알리이올라니 할레 Aliiolani Hale 정부청사 건물은 칼라카우아 Kalakaua 가 왕이 된 지 몇 달이 지난 뒤인 1874년 5월에도 완공되지 못했다.
이 장소는 정부의 공식 업무뿐만 아니라 왕족들도 참여하는 각종 행사도 열렸다.
알리이올라니 할레 Aliiolani Hale 의 초석의 위치는 최근까지 수수께끼로 남았으나 2002년 첨단 레이더 장치로 찾아낼 수 있었다. 초석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당시의 신문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초석을 열려는 시도는 없었다.
1872년 고종 9년. 개성에 행차한 고종은 “개성부는 우리 조선으로 말하면 왕조가 일어난 고장이나 다름이 없다” 라고 개성부의 의미에 관해 언급하였다.
1392년 조선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새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개성은 고려의 그늘도 있지만,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한 곳이 개성의 수창궁이었고, 제2대 왕인 정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자의 난을 이유로 다시 천도한 곳도 개성이었다. 1405년(태종 5년)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지만, 개성에는 태조의 정비이자 정종과 태종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 씨가 묻힌 제릉이 있었고, 정종과 그 비인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이 있었다. 또한 태조의 잠저(潛邸)였다가 이후 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된 목청전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 대부분의 왕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해마다 제릉과 후릉에 친히 행차하여 제사를 올렸고, 목청전에 가서 참례를 올리고 돌아왔다. 개성에 가서 제사를 올리지 못할 때는 직접 축문을 써서 향과 함께 개성으로 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의 개성 행차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개성에 행차하여 친히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일은 유교국가 조선에서 효를 실천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줌은 물론 왕위의 정당성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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