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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Feb 15. 2022

번외 - 중국에 살어리 랏다

니하오~❤️

2004-2008년 중고등학교의 추억




벌써 20년 전이지만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생각나는 학창 시절이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정말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고 정말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니고 중국어 공부도 영어공부도 정말 정말 열심히 할 텐데. 아직도 후회가 가장 많이 되는 시절.


그랬다. 그때는 내가 사춘기어서 정말 진상에 진상을 부리고 요새 중2병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중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까지 왜 그랬을까 하는 일들을 다 했던 것 같다. 그나마 학생이라 미성년자라 주변 사람들이 다들 참아주었던 것 같다ㅠㅠ




우리 가족은 아빠 회사 발령으로 인해 중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당시 교복 입고 학교 다니다가 해외로 간다는 게 뭔가 되게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진짜 친한 친구 몇 명에게만 말하고 비밀로 하면서 놀러 학교를 다니다가 중간고사 직전에 자퇴해버렸닼ㅋㅋㅋ 되게 쓸데없이... 담임선생님께서 어이없었을 듯 ㅠ


그리고 마지막 작별인사라며 친구들을 단체로 만나고 따로 만나고 같이 만나고 아무튼 온갖 눈물바람으로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작별인사를 하고 ㅠㅠ 그리고 중국 가서도 나는 힘든데 한국 친구들은 잘 지내는 거 같아 보여 돌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잠수(?)를 타버리기도 하고 싸이월드도 지웠다가 살렸다가 온갖 난리를 쳤었던 것 같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해야 되나 참 부질없는 짓을 많이 했다. ㅠㅠ





우리가 가는 지역은 당시에는 대도시라기보다 새롭게 발전 중인 공업도시에 가까워서 중국에 관련된 소문도 흉흉하고 무서웠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니까 아빠 회사 사람들이 모두 같은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살아서 단지 안에 한국 마트 한인 미용실도 있고 집 밖에 나가면 한국인들을 매번 만날 정도로 거의 한인타운 급이었다. ㅋㅋㅋ 그리고 우리가 다녔던 학교는 외국인 학교였는데 거기도 한국인이 학생 수의 반을 채울 정도로 많았다.


출처: 학교 홈페이지 https://www.nischina.org/about/our-campus


지금은 학교 규모도 굉장히 커져서 입학 조건도 까다롭고 국적 비율도 관리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내가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어디 호텔 지하 같은 데에 공간을 빌려서 교실을 만들었고 운동장도 없어서 버스 타고 왔다 갔다 했다 ㅋㅋㅋ 그리고 바로 다음 학기 학생 수가 급증하며 우리는 으리으리한 캠퍼스로 학교가 이사하였다.


규모가 커졌다고 하지만 당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십 명도 안됐던 상황에서 250명 가까이 될 정도였고 한 학년 당 한 학급으로 운영되었다 ㅋㅋ 그리고 그 반 고대로 다음 학년으로 진학해서 누가 이사 가지 않는 한 매년 같은 친구들이랑 수업을 듣는다. 나는 8학년에 입학해서 12학년 까지 졸업하였다.



내가 처음 학교를 간 날 선생님이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으셔서 나는 코리아 라고 대답했고 공식 질문인 노스? 사우스? 를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때 영어를 잘 못해서 그냥 예스 예스 했더니 어느새 북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ㅋㅋㅋㅋㅋㅋ 같은 반에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정정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어차피 내가 못 알아들어서 신경 안 썼을 수도 있닼ㅋㅋㅋㅋㅋㅋㅋ ㅠㅠ


아무튼 그 정도로 학교는 신세계였다 매 수업시간마다 교실 찾아 쫓아다니고, 영어도 못 알아들어서 수업도 거의 몰랐지만 필기는 열심히 했고, 한 10학년 때까지 한국 중1 때 배운 수학으로 잘 버텼다 그 뒤로 수학도 낮은 반 수강함ㅠㅠ



아무튼 학교는 시설도 어마 무시하게 좋았고 수업도 나름 괜찮았다. 영어수업도 레벨 별로 나눠져 있었고 심지어 영어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수업 진도를 전담으로 도와주는 수업까지 따로 있었다. 그 수업의 선생님은 다른 과목을 학생들과 함께 듣고 예습 복습 숙제 등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수업이었는데 이론상으로는 그랬다고 한다.ㅋㅋㅋㅋㅋ


수학여행도 좋은 데로 보내주고, 미술 연극 체육 악기 등 정말 다양하게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다. 체육시간에 암벽등반도 해보고 산악자전거도 타고 수영장도 가고 뭐 무용도 무대에서 발표하고 농구도 배우고 미술시간에 도자기도 만들고 타일 모자이크도 하고 가구도 만들고 사진작품을 찍어서 암실에서 현상도 하고 생물시간에 어느 동물의 심장이랑 위장, 눈도 해부해 보기도 하고 피아노도 배우고 무슨 연극도 하고 뭐 되게 많이 했었다.



이 학교는 국제 인증 교육프로그램인 International Baccalaureate, IB 학교로,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학위협회가 인증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초 중 고등 과정이 구성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Pirmary Years Programme, PYP 는 유치원~5학년, 중학교 Middle Years Programme MYP 는 6학년~10학년, 고등학교 Diploma Programme DP 는 11학년~12학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중학교 졸업요건으로 수업 9과목 + 6개월 간 장기 프로젝트 + 봉사활동을 해야 했고 고등학교 졸업요건으로 수업 6과목 + 철학 + 졸업논문 + 봉사활동 그리고 무슨 직업체험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유행이었던 웰빙라이프 프로젝트랑 중국 동북공정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한국 역사를 알리는 졸업논문을 열심히 썼던 기억이 난다.


엄청 체계적이고 학교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정말 좋은 교육환경이었다. 그리고 연차가 지나면서 나는 어리바리했다가 성적우수상도 받을 정도로 적응했다. 하지만 저 수업은 필수 과목이었던 모국어 문학 과목 = 한국문학이었다 ㅋㅋㅋㅋㅋ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렇게 좋은 환경에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나도 어차피 대학교 한국으로 갈 거 특례 공부하게 전학시켜달라고 온갖 떼를 쓰고 엄마랑 싸우고 그랬었다 ㅠㅠ 그 당시 학비가 1년에 거의 ¥20만 위안 ($3만 불) 이었던 걸 감안하면 (지금은 더 오름) 정말 복에 겨워 똥을 싸는...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한국이 더 좋고 더 재밌는 것 같아 보였다. ㅠㅠ


이 학교는 가을학기제라 내가 6월에 졸업해야 하는데, 그러면 나는 친구들보다 1년 대학을 늦게 가는 상황이고 수시 공부도 따로 해야 했으니 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아무튼 외국인학교 졸업해서 나는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다행히 대학도 합격하고 알바로 과외도 많이 들어오고 이력서에도 쓰고 취직도 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대학원 논문까지 쓰고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정말 큰 터닝포인트였다. 그리고 이렇게 큰 기회를 주신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ㅠ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사춘기이기도 했고 정체성 혼란도 있었고 국제학교 다니면서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주눅 들어 눈치만 늘고 나의 이상은 하늘처럼 높은데 내 영어실력이나 학업 성취도가 한국에서 처럼 따라주지 않아서 나를 부정했었던 것 같다. 특히 외모에도 자신이 없었고 자격지심이 있었는지 이제 보니 내 사진은 없고 다른 사람들 사진만 있었다. 에구... 참 그럴 필요 없었는데 싶다가도 그런 날들이 있었으니 내가 이런저런 생각이나 경험을 하기로 선택했지 싶기도 하다.


그때 만났던 정말 좋은 사람들께 모두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ㅠㅠ 그리고 지금도 내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기회를 이미 갖고 있는데 모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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