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Mar 19. 2022

4 이혼서류 작성하고 시작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상상하기

남편의 나라에 이민 온 나는 너무나도 다른 가치관과 문화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로 인해 한국행 비행기도 뜨지 않았고, 가정법원 역시 위급상황이 아닌 재판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여서 이혼 사건은 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최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였다. 당연히 최선의 상황은 남편이 개과천선해서 나에게 잘하는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우리가 이혼하는 것이었고 그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법했다. 나는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아이 없는 우리 부부의 합의이혼은 아주 간단했다. 서류 몇 장 만으로도 우리의 사이는 정리될 수 있었다. 우리의 결혼은 수십 장의 이민 신청 서류와 10개월이라는 긴긴 시간을 기다려서 비자 승인을 받고, 겨우겨우 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던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https://www.courts.state.hi.us/self-help/courts/forms/oahu/family_court_forms




이곳의 이혼 서류는 아주 현실적으로 이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양식이 굉장히 잘 되어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양식도 굉장히 자세하고 직관적이어서 거짓 없이 빈칸만 채우면 따로 준비할 게 없었다. (아이가 있다면 다른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그 서류에는 친권 / 양육권, 양육비, 방문 교섭 일정 등등 역시 자세하게 쓰여있었다.)


특히 가장 체계적이었던 부분은 재산분할. 수입과 지출, 빚, 기타 자산 등을 항목별로 적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우리의 경제 상황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상황도 보인다.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아이도 없고 애완동물도 없고.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우리 둘 뿐이었다. 우리 둘의 선택에 의해 서로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결혼했을까? 우리는 그냥 동거만 한 걸까? 우리는 딩크였을까? 우리도 가족일까? 이렇게 전쟁같이 싸우기만 하고 헤어지면 결혼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그리고 또 나에게 신선했던 부분은 이혼 후에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이다.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양육비나 생활비가 책정되는 한국과는 달리, 결혼 당시 영위했던 생활수준과 부부의 소득기준에 따라 위자료가 책정된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배우자가 이혼하고 싶더라도 생계 때문에 못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인품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에서는 이혼하면 가장이 위자료를 주느라 등골 빠진다는 소리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결혼 후 아내가 전업주부를 하기로 부부끼리 합의했다면, 이혼 후에도 아내가 직업을 구하거나 재혼을 하기 전까지 아내의 생활비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아이가 있으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리고 만약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이혼한 배우자와 동거하면서 소득이 없는 경우 (예를 들어 대학을 다녀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에도 계속 부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부담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혼전계약서를 쓰나 보다. 그런 사랑의 말로는 결국 돈이었던가? 뭐 돈도 없고 맞벌이인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직장, 가족, 친구, 내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남편의 나라로 이민까지 오는 (내 나름대로의) 희생을 했는데 사랑도 못 받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혼하려니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모든 차이와 시선을 이겨내고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낭만이 있었는데, 결국 우리도 남들이 다 말하는 성격차이로 이혼하는구나.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했다. 지금의 고민이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남편과 (상상) 이혼했다면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 결국 이런 고민들도 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혼할 거면 고민할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들이니까. 나는 결혼했으니 우리가 평생 사랑할 줄 알았다. 내 사전에 이혼은 절대 없다고 믿어서 이혼할 생각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행하다면 이혼이라는 선택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을 바꿔먹음으로 해서 내 마음에는 큰 변화가 되어준다.




나는 그렇게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사직서를 작성하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리고 정말 오늘만 살 것처럼 살았다.


이전 03화 3 감정 쓰레기통의 필요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