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22
일요일이었던 어제는 파티에서 남은 케이크와 커피 한잔으로 평화로운 아침을 시작했다. 이 치즈케이크는 하와이 유명 일본식 베이커리에서 오신 귀한 몸! 쿠루쿠루 라는 베이커리인데 하와이 오픈 챗에서 굉장히 핫하다.
주말에도 출근하려는 남편과 정말 오랜만에 함께 식탁에 앉은 것 같다. 나는 평일에만 출근하지만 적어도 7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오후 12시 넘어서 출근하기 때문에 매번 잠든 모습을 뒤로하고 나왔었다. 얼마 만에 밝은 시간에 둘이 깨어있는 시간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정말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이 신나서 이야기해주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실 나는 저질 체력이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정말 피곤하다. 일도 많이 안 하는데 왜 그러지 ^^;; 싶을 정도로 누워서 꼼짝을 안 하는, 그리고 거의 10시만 돼도 잠들어버리는 편이다. 4시 반 퇴근이라 5시에 집에 도착하는데 저녁 있는 삶을 즐길 수 없다 ㅠㅠ 그래서 저녁 8시 넘어서 집에 오는 남편과 대충 안부인사(?) 만 하고 각자 할 일 하게 되는 것이다. 신혼 초에는 뭐 이러려고 결혼했나? 생존신고만 하고 깨 볶을 정도로 행복하지도 않은데 결혼이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원래 행복은 결핍에서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각기도생으로 지내다가 주말 아침에 잠깐 대화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 거리고 남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캔디~ 꿈처럼 달콤하게 들리는 듯하다. 어디 함께 외출한 지도 몇 달, 어디 카페를 가본 것도 진짜 몇 년은 된 것 같다. 브런치를 먹거나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거나 하지도 않는데... 남편은 집돌이라 외식도 외출도 여행도 안 하고 남자들이 다 그런가? 결국 좋은 데는 친구들과만 가게 되는 것 같다 그 집 남편들도 그러려나 ㅠㅠ
이런 게 행복인가? 이렇게 소소한데? 더 화려하고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결혼생활은 없을까?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만. 고부갈등 장서갈등으로 김치 싸대기 날리고 예나 내 딸이에요 하면서 갑자기 애엄마가 되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나, 길 걷다가 번개 맞아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응급실 치료비 3천만 원을 내네 안 내네, 비싼 옷이며 명품이며 가구며 인테리어며 돈 처발랐다가 빚에 허덕일랑 말랑 하는 그런 막장 말고... 사실 이런 소소한 일상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건가? 참 소소했지만 그래 행복했다.
남편은 요새 매일 늦게 퇴근한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 집은 남편이 요리 담당인데 늦게 퇴근해서 내가 알아서 저녁을 차려 먹어야 함 ㅠㅠ 나의 불치병인 귀차니즘으로 대충 과자나 콜라나 먹고 마는데, 건강에 진심인 남편은 도시락도 알아서 싸가고 퇴근하고 나서도 과일까지 챙겨 먹는다! 항상 예쁘게 썰어서 침대까지 가져다주는 로맨틱한 남편이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얼마나 자상한가.
우리 이혼했어요 2 에 출연하는 일라이 지연수 부부의 일화 중에서 아내가 한 말이 너무나도 와닿는다. “내가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하면 너는 복숭아를 씻어서 나한테 접시에 잘라다 줬었다. 복숭아가 먹고 싶지 않아도 네가 잘라 주는 게 너무 좋아서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 과일을 챙겨주는 행동에 느껴지는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그 여름 냄새, 함께 한 시간, 진심이 전달되던 순간들. 나도 나중에 이런 시간들이 꿈에 사무치게 그리워질 날이 올까?
그런데 보면 일라이가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이 하는 말들이랑 똑같다. 다정하게 건네는 말과 행동들도, 답답하고 무책임하게 보이는 말과 행동들도 굉장히 비슷하다. 미국인의 생각이 대체로 그런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시부모님과 아내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남편의 역할이자 의무인데, 미국인들은 가족이라는 개념 안에서의 고부관계가 아니라 아예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보는 것 같다. 아주 한국적인 나의 시점에서는 만약 개인 대 개인으로 보자면 시부모님은 어차피 남편 아니면 정말 일평생 만날 일도 없을 아줌마 아저씨인데, 계급장 다 떼고 한판 붙으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예 만날 일 없게 무시하면 되나? 내가 하고 싶은 말, 맞받아 치고 싶은 말 그냥 다 해도 된다는 건가? 물론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겠지만;;
또 비슷한 점은 주관을 지키려 한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니면 미국 사회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통념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상대의 요구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우선시한다는 점. “나도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너랑 싸울 때 그 자리에서 싸움을 끝내자고 하면 내 마음에 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뭔가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남편을 몰아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남편도 독하지만 대단하다.
그리고 나는... 아내 분의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가 가면서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남편 분의 입장도 너무나도 이해가 간다 ㅠㅠ 정말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한 게 아니라 외적인 상황 때문에 헤어져서 그런가 너무 마음 아픔 ㅠㅠㅠㅠ
아내는 결혼생활에서 받았던 설움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마음속에 여전히 응어리져 있을 것 같다. 지금 아무리 겉으로는 사이가 좋고 애틋해 보여도 속은 아직도 썩어 문드러져 있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을 어느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걸 말로 계속 꺼내놔야 한이 풀리는데 정작 들어주는 이는 왜 자꾸 옛날 얘기를 꺼내 싸움을 만드냐고 하니 또 억장이 무너지는 게지 ㅠㅠ 나의 상처는 이렇게나 깊은데 왜 가해자들은 아무도 못 본 척하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겠지
남편은 일단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부모님이 잘못하셨을 수도 있지만,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그것도 아직도 경제적으로 의존 중인 부모님을 등지는 건 누구나 힘들 수 있으니까... 이미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분도 대신해서 사과했고 상대는 그 사과를 받아준다고 했는데도 계속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싸움, 또 도돌이 표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지 ㅠㅠ
그래도 그냥 반박하지 않고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이렇게만 말해주면 안 될까요 남편님 ㅠㅠ 아내가 느낀 상처는 진짜였을 테니까.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라고 인정이라도 해줘요 ㅜㅜ 근데 우리 부모님은 그럴 사람 아니야 이런 말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 순간만큼은 그랬구나 만 해줘요 ㅜㅜ
하긴, 내가 뭐라고 이런 심심한 위로의 말을 할까. 뭐든 시기상조 일수도 불필요한 발언일 수도 있으니까.
나나 잘하자ㅠㅠ 일요일 아침에 남편과 일상적인 대화하는 걸 행복으로 여기며. 사실 그러려면 이것도 남편의 이야기에 너무 집중하면 안 된다. 진위여부를 따질 필요도 사실관계를 파헤칠 필요도 없는 그냥 남편의 이야기이니까. 그냥 들어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더도 덜도 말고 그 정도만. 그냥 목소리만 듣는다 생각하고 듣기. 얼굴을 보며 눈 맞추고 대화하던 순간을 즐기기. 나른한 아침, 여유로운 시간, 그때 들리는 목소리, 참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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