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단어 앞에 "그냥" 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이 글은 저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나와는 다른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고 타인의 행동을 존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으로 누군가를 감히 평가하거나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을 때까지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저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나는 동성보다는 이성친구가 더 많은 편이야
남사친이랑 진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 일 정도로 친한 사이야
차라리 남사친이 게이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어.
수년 전, 내가 선생님께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했지, 뭐.
그.런.데. 그녀의 남사친이 내 남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냐면 선생님과는 나도 아는 사이였으니까. 선생님께서 '나를 위해서' 내 남편과 '영원한 친구'가 될 줄은 몰랐지.
그렇게 선생님께서 나에게 실전 인생을 가르쳐주시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줄이야 진정 꿈에서라도 상상조차 못 했지.
덕분에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힐 수 있었지. 세상에는 정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같은 한국인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여자라고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내가 편견이 있었구나. 내가 잘못 알았구나.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를 더 잘 알아갈 수 있었지. 나는 남편과는 다르게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원하는 결혼생활은 이런데, 남편이 원하는 사랑은 저런 모습이구나. 결혼했으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나의 믿음이었구나. 나는 이럴 때 행복한데, 그러려면 이런저런 노력을 해야 하는구나.
남사친 여친에게도 말했어요. 차라리 남사친이 게이었으면 좋겠다고, 같이 살 수 있게.
그 후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의 다른 여사친에게 들은 말이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평생에 한 번 들은 것도 대충격이었는데, 이 핵폭탄급 발언을 살아생전 두 번이나 내 귀로 들을 줄이야. 나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세계관에 혼란이 온다. 동공 지진. 내 안의 유교걸이 멸종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잠깐 숨을 쉴 수가 없어 참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한국이 이렇게나 개방된 사회였던가? Hoxy... 내가 한국에서 멀티버스를 통과해서 미국으로 온건가?
그래, 미국에서는 남사친 여사친끼리 동거도 하고 그런다더라. Friends 에서도 나왔고 How I met your mother 에서도 나왔고 내가 본 미드에서 다 그렇더라. 내 주위에 친구끼리 플랫 쉐어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고. 이곳 학교 기숙사는 남녀 구분도 없이 혼성으로 사용하고, 호스텔에서도 남녀공용 도미토리 방이 있기도 하니까.
물론 내가 한국인 두 명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한국 사람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화할 필요도 없고, 과민 반응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 사람들의 의견일 뿐.
선생님과의 사건 이후 내가 맹목적으로 읽었던 책. <NOT "Just Friends"> 물론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찾아다녔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영문으로 된 미국 책에서 나와 같은 사상을 가진 내용이 나오니까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았던 책.
You know you’re in trouble when the word “just” appears before the word “friends.”
"친구"라는 단어 앞에 "그냥" 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더 이상 "그냥 친구"가 아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게 친구가 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즉! 그 친구가 게이는 아니라는 말 아닙니꽈?????
"우리 그냥 친구야~" 가 "우리 친한 친구야~" 가 되고, "우린 가까운 친구야~" 가 되고, "우린 특별한 친구야~" 가 되고, "우린 영원한 친구야~" 가 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 죽기 직전까지 간 사람으로서!!!!!!!!!! 두 분의 우정을 축복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제 능력이 거기까지 가진 못하네요... 저는 그 남사친의 여친에게 더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아무 일 없었을 거라는 거 안다. 진짜 친구 시겠지. 하지만 그 "아무 일"은 누가 정하나? 남편과 선생님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내가 걱정할 만한 사이도 아니고 진짜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런데 내가 걱정할 만한 정도를 누가 정하나요? 내가 싫다는 데 왜 선생님께서 정도를 정해주시나요?
내가 참고 참다가 선생님께 전화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자신은 절대로 "친구" 외에 다른 수식어를 써서 남편과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없다고 호언장담하셨었다. 나보고 남편에게도 물어보라고, 그리고 카톡이나 메일을 직접 읽어보라고.
까딱하면 넘어갈 뻔했겠지만, 사실 나는 카톡이랑 메일을 다 읽고 전화를 드린 거였다. 그래서 옛날 일들은 고사 하고서라도 고작 2주 전에 보낸 메일에서 '영원한 친구' 라고 하시지 않았냐며, 선생님을 따라 한국으로 오라고 하시지 않았냐며, 그 문장을 그대로 읽어드렸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그 단어를 쓴 건 맞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도로 쓴 건 아니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아아, 그러셨구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E7pz5XmGUk
후하후하. 심호흡 한 번 하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 오은영 박사님께서는 말씀하셨지. 이성 간의 친구 가능하다고. 그래, 오은영 박사님도 50년 지기 남사친이 있으시다는데.
박사님의 생각은 다 그런가? 내가 척척 석사로 생을 마감하려니, 이성 간의 친구에도 지켜야 할 선까지밖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 걸까?
나는 얼마나 더 대혼란을 겪어야 안정이 될까? 어쩌면 내가 안정이 되려면 남편과 남편의 여사친들과 아예 안 보고 사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애초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게 정답일까?
<돌싱글즈3>의 한 출연자처럼 내 마음을 초기화시켜야 하는 걸까? 미국 돌싱들 모집한다는데...
실상은 두 분 다 좋은 사람이라는 거, 나도 안다. 평판도 좋으시고, 공직에 계시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셨으니까. 개인적으로도 봤을 때에도 성격 좋으시고 능력 좋으시고 정말 나무랄 데가 없는 분들이라는 거.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악의가 없어서.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있는 꼴. 사람 하나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아주 좋은 상황.
남편의 친구로 만난 관계가 아니라, 나와 먼저 친구 사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안해요. 저는 차라리 당신이 게이였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