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틴 맨과 시티 걸
시댁은 미국 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서대문구와 비슷한 크기에, 인구는 서대문구보다 20배가 적은 그런 작은 마을이지만, 카운티 내에서는 가장 큰 도시라고 해요. 한강의 7배 정도인 태평양 연안 북서부에서 가장 큰 강과 인접해 있어 역사적으로도 인디언 부족이 오랜 전통을 이어왔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 커뮤니티 칼리지와 ROTC 까지 있어 근처 소도시에서 통학을 하는 학생들도 있대요. 프레드 마이어와 세이프웨이 같은 마트도 있어서 주변에서 장을 보러 오기도 하고, 맥도날드와 버거킹도 있고, 멕시칸 음식, 일식과 타이 음식점까지 있는 이 지역의 시내 중심가(!) 그럼에도 도시 규모가 작아 대중교통이 없어서 운전이 필수인 그런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동양인이 없어요 ㅜㅜ 미시건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부모님 댁에도 한인 교회가 있었는데, 이곳은 이 동네에도 옆 동네에도 다 합쳐서 동양인이 한 두 가정밖에 없나 봐요. 저는 한(인타운)세권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있어요 ㅠㅠ 한국 영사관이 있는 도시나, 적어도 H마트 배달이 되는 곳에서라도 말이죠 ㅠㅠ
이웃을 믿어서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동네
마을에 오래 산 사람들은 모두가 친구이고 모두를 알고 지내는 동네
물건을 나눠 쓰고 빌려주고 물려주는 게 당연한 동네
누군가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지나가는 길에 들러 잘 지내는지 확인하거나
마을 전체가 삼삼오오 음식을 해서 일손을 도와주는 동네
여전히 신문을 읽고, 편지를 보내고,
크로스워드 퍼즐을 하거나 모여서 카드 게임 보드 게임을 하는,
그런 여유 있고 조용한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고 서로의 연애사와 흑역사를 공유하는
음식점을 가도 병원을 가도 학교를 가도 마트를 가도 서로를 알아보는
그래서 어쩌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떠나려고 안달이 나는
그런 동네
남편은 사춘기를 이 광활한 들판을 매일 걸으며 보냈다고 해요. 언덕에 올라서 마을 전체와 강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건전한 사춘기... 뭔가, 제가 갖고 있었던 미국인에 대한 편견이나 미드에 등장하는 10대와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예요. ㅋㅋㅋ 실제로 시댁에 와보니 도시에 사는 인구보다 교외나 중소도시, 또는 작은 마을에 사는 인구가 더 많아서 미국 살이에 대한 저의 시각을 훨씬 더 넓힐 수 있었어요. 실제로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데,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소식들은 사회의 한 단면만을 보여주니까요.
저희 남편은 자연을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표현해요. 그리고 저희가 처음 연애할 때, 자신은 mountain man 이고 저를 city girl 이라고 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도 자연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그 자연의 스케일이 이렇게 어마어마할지는 정말 몰랐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반도 면적의 3/4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서대문구에 살았던 저는 안산과 백련산도 가까이에 있고, 저희 학교는 북악산 중턱까지 있었고, 남산도 가보고 청계산도 가보고 관악산도 가보고 한강공원도 월미도도 가봤으니까요!
서울과는 또 다른 의미로 이곳의 자연은 정말 대단해요.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자연 풍경을 보면 경이롭기도 하고, 저 거대한 자연에 비해 내가 가진 문제들이 사사로워 보이기도 하고, 자동적으로 생각의 환기가 되어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는 마음을 다짐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의 흔적이 많지 않아 거의 야생(?) 같아요. 실제로도 야생 사슴이나 여우, 스컹크, 라쿤까지 산책길에 만나기도 하고 간간히 곰도 본대요 ㅠㅠ 서울은 많이 발전된 도시라 산 중턱까지 버스가 가고, 산 꼭대기까지 케이블카도 설치된 곳도 있고, 등산로도 계단이나 포장길로 잘 관리되어 있고, 산에는 팔각정이나 운동기구도 설치되어 있어, 약간은 인위적인 자연이지만 그래도 안전하잖아요 ㅠㅠ
시댁의 정원에 새 모이를 뿌려두면 정말 많은 새들이 날아오고 가끔 작은 동물들도 손님처럼 와요 ㅎㅎ 정원에는 반려동물이 뛰어놀았을 때도 있었고, 공원에서 함께 운동하거나 산책가기도 했었대요.
남편이 어린 시절 산책했다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면...
꽃과 나무의 이름을 설명해주고 진흙에 남겨진 발자국만 보고도 사슴인지 라쿤인지 알려주는 그런 모습의 남편
새와 동물의 이름을 알고 있고 색깔과 크기의 차이에 따라 다른 종류를 맞출 수 있는 그런 모습의 남편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오랜만에 만나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는 그런 모습의 남편
그리고 어린 시절을 보낸 집안 곳곳에 묻어나는 남편의 사진이나 추억의 물건들에서 보이는 그런 모습의 남편
저와 함께할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서울에서는 남편이 산책 가자고 하면 출근해야 하는 평일에는 귀찮아하기도 하고, 나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 하면 흘려들었거든요. 남편의 다양한 모습을 보려면 먼저 제가 남편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미국의 문화는 결혼이나 생일, 출산 등 축하하는 선물을 할 때 주인공이 원하는 것들로 직접 목록을 만들어 인터넷이나 백화점에 레지스트리로 등록한다고 해요! 선물 잘 못 고르는 저에게는 너무나도 편한 시스템 ㅎㅎ 카카오톡에 위시리스트에서 골라서 선물 줄 수 있는 것처럼 상대가 원하는 걸 사줄 수 있으니 받는 사람도 훨씬 더 좋겠죠.
비슷하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려줄 수 있는 웹사이트도 있어요. 병환이 있으신 시아버지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온 마을이 시댁 가족을 위해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었어요.
시부모님께서 대도시인 맨하탄에서 작은 마을로 이사를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은 마을에서처럼, 현대인에게는 약간의 정신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도움을 받기도 주기도 어색해졌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나의 진심을 표현하려는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서로를 위해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만 있다면, 서로의 마음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다면, 서로의 존재와 그 소중함을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지금 이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일기로 남겨봅니다 : )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https://m.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Contents.ink?barcode=480D211040150#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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