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의 가슴 아픈 역사
하와이, 아름답게 보존된 자연환경과 넓게 펼쳐진 해변과 석양을 볼 수 있는 지상낙원. 한국에서도 신혼여행이나 1년 살기로 많이 방문하는 휴양지이다. 호놀룰루의 도심에는 하와이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유적지가 있다. 바로, 이올라니 궁전 (A) 과 워싱턴 플레이스 (B), 하와이의 마지막 군주였던 릴리우오칼라니 Liliuokalani 여왕의 동상 (C), 하와이의 대법원 (D) 등이다. 독립 국가이자 군주와 왕실이 존재했고, 하와이 언어와 구전 문학, 전통 음악과 춤 등 특별한 문화를 보유했던 하와이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1893년 1월 14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새 헌법을 결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전위원회 The Committee of Safety 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새 헌법은 하와이의 모든 섬에서 기존의 헌법을 개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하와이 왕국에 등록된 유권자 9천5백 명 중 6천5백 명, 즉 3분의 2가 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새로운 헌법이 국가의 법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명의 장관이 여왕과 함께 서명해야 했는데, 하와이 국민의 오래된 권리 중 일부를 회복시키고,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내각 장관들은 새 헌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이 헌법에 반대한 내각인 13명의 안전위원회는 출생 또는 귀화한 외국계 하와이 시민 6명, 미국계 5명, 독일계 1명, 호주의 섬인 태즈메이니아계 1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국이 하와이 섬을 합병할 때까지 임시 정부를 만들었다. 안전위원회는 미국의 하와이 장관 United States Minister to the Hawaiian Kingdom 에게 하와이에 거주하던 미국인의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이날 오후 보스턴에서 162명의 미국 해군과 해병이 오아후 섬에 상륙하였다.
1893년 1월 17일 아침, 샌포드 돌 Sanford B. Dole 은 하와이 왕국의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임시정부의 대통령직 Presidenc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을 수락했다. 이른 오후, 안전위원회는 알리이올라니 할레 Aliiolani Hale (현 하와이 주 대법원 건물) 의 계단에서, 군주제를 전복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같은 날 늦은 오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났다. 여왕은 마지막으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미국 군대가 호놀룰루에 상륙하였기에 무력 충돌과 인명손실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미국 정부가 하와이 왕국에 행한 부당한 대우를 취소하고 왕권을 복구할 때까지, 엄숙한 항의 하에 강제로 항복하는 바이다." 라고 연설하였다.
2년 후인 1895년 1월 16일, 하와이 공화국은 군사 위원회를 임명하여, 왕정복구 운동을 했던 여왕의 지지자들을 재판에 회부했고,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역시 공범으로 체포되어 반역죄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895년 1월 24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가택연금 중 군주로서의 권력을 박탈하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아 공식적으로 왕좌에서 물러났다. 여왕의 폐위는 절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여왕은 본인만을 생각한다면 그 서류에 서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지만, 이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하와이 왕국과 군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체포된 모든 사람들이 즉시 석방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군주 퇴위 서류에 '릴리우오칼라니 도미니스 Liliuokalani Dominis' (미국인 남편의 성) 라는 서명을 하라고 하와이 공화국 정부 관계자에게 명령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왕의 모든 서신이나 서류에는 항상 '릴리우오칼라니' 로 서명되었기에, 이후 이 서류와 관련하여 여왕의 법적 이름으로 서명되지 않은 문서가 합법적인 효력을 가질 수 없다며 서류의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1895년 2월 5일부터 시작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재판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군사위원회는 2월 27일 피고인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에게 징역과 노역 5년에 벌금 5,000달러라는 선고를 내렸다. 그 형량은 이올라니 궁전의 2층에 위치한 방의 금고형으로 감형되었다. 여왕의 변호사는 <여왕의 재판 Trial of a Queen> 을 출판하여,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재판은 캥거루 재판 kangaroo court 이라고 묘사하였다. 캥거루 재판은 재판 시작도 전에 결과가 정해진 채로 진행하는 보여주기 식의 재판을 말한다.
7개월 후인 1895년 9월 6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그녀의 자택인 워싱턴 플레이스 Washington Place 로 가석방되었고, 1896년 10월 사면되었다.
이렇게 1795년부터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하와이 왕조는 외국인들의 쿠데타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된다. 1893년 1월 17일 쿠데타 세력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고 1894년 7월 4일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898년 8월 12일, 미국으로 군사 합병되었고, 1900년 4월 30일부터 미국령으로 The Territory of Hawaii, 2차 대전 이후인 1959년 8월 21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93년 미 상원의원 대니얼 아카카 Daniel Akaka 에 의해 발의된 하와이 왕국의 전복에 대한 미국의 사과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하와이 원주민들은 고유한 주권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국의 참여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개화파 세력과 함께 친일내각을 만들어 일본식 개혁(갑오개혁)을 추진하고,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지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과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경복궁을 기습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자주권이 훼손되고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내각은 친러파가 장악하면서 일본은 식민지화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수립하였고 대한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내외로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조선을 계승한 국가이자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국이며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의 위계질서였던 청나라,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이 필요한 러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북진 정책을 펼치는 일본에 둘러싸여 있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중립을 주장했던 대한제국에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공수 동맹을 맺고 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고,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 협약,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 협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한국을 보호 국가로 전락시켰다. 이 2차 한일 협약은 체결 당시에는 아무런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후에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조약,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며,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을사오적이라고도 칭한다.
을사조약은 국제법상 성립되지 않는 조약이었다. 58년 후인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한일 협상)의 제2조를 통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고종 황제는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고,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합의 후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이다.
1907년 4월,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고종의 폐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3차 한일 협약 (정미 7조약) 을 강요하여 1907년 7월 24일에 체결한다. 이후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경술국치) 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호로 이어지고 있다.
https://c-straw.com/magazine/1277
http://www.mediatrip.kr/news/news_view.php?idx_no=10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