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남편과 독일 곰팡이

쉼멜 Schimmel ㅠㅠㅠㅠㅠ

by 홍이

지금은 잘 적응해가고 있지만

처음 독일에 이사 오고

남편은 뭔가 더 미국인스러워(?) 졌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낯설고 어렵고 위축되는 그런 느낌에

익숙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하겠지만...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특히 초반의 행동 하나로

오래오래 고생한 일 한 가지가 있었으니 ㅠㅠ


바로바로 환기!




독일은 매일매일 환기 Lüften 하는 문화가 있는데

얼마나 진심이냐면...

하루 세 번 15분 집 전체를 환기시키는 게

월세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심지어 임시 숙소 계약서에도 MUST 라고 쓰여있음


구축 건물이 많은 독일에서

실내 공기 순환을 시켜서 곰팡이 예방하고

집 안을 숨 쉬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독일의 창문은 대부분

위쪽만 살짝 열거나 전체를 활짝 열 수 있는데

집 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집 전체에 바람길을 내주어서 환기를 시켜야 한다.




보통 미국 건물에는 에어컨과 환풍기가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굳이 열어 둘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늘 도시 중심가에서 살아서,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내가 창문만 열어두면 계속 닫고

하루에 세 번 네 번씩 샤워하고서도 ㅡㅡ

스팀 가득 찼는데도 창문 닫음 ㅡㅡ

창문 열어야 한다고

잔소리 잔소리를 해도 그냥 아묻따 닫아버림


반지하라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누가 들어올까 봐 그런 걸까?

우리 임시 숙소는 거주지역이라 사람도 잘 없고

독일은 총기 규제도 엄격하다는데...




2주 만에 화장실 천장 전체에 곰팡이가 싹 슬어버렸다.

우리 입주 전에 페인트칠 새로 다 하시고

화장실 리모델링 새로 하셨다고 했는데

벌써 곰팡이 어택 당했다...


그것도 심지어 나는 시력이 나빠서 모르다가

곰팡이가 다 퍼지고 나서야 발견했는데 ㅠㅠ

시력 좋은 남편은 곰팡이가 퍼지는 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는 얘기...?


결국 내가 몇 번이나 천장에 락스 뿌려가며 청소하고

심지어 길에서 선풍기도 주워옴 ㅋㅋㅋ




한 번은 천장 청소하느라 팔이 떨어지게 아팠는데

자기 때문에 생긴 곰팡이인데

당연히 내가 청소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화나서

개판 싸우고 다음부터 네가 치우라고 못 박았더니


그 이후로 갑자기 창문 열고 선풍기 트는데 열과 성을 다하며

나한테까지 샤워하고 벽에 물기 걸레로 닦으라고

잔소리 시전하는데...

증말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약품이랑 청소도구 선풍기나 제습기 같은 거 사자고

아니면 집주인 아저씨께 말씀드려서 청소해 달라고 했는데도

좀 기다려보자고만 했으면서 (어차피 연말에 이사 갈 거라)

이제 와서 곰팡이 명예소방관 납셨고요~~


나중에 자기가 잘 몰랐었다고 사과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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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0년 전...

처음으로 해외에서 살게 되면서 외국인학교 8학년으로 전학 갔었다.

수업도 많이 하지도 않아서 세시면 학교 다 끝나는데

집에 오기만 하면 맨날 기절하듯이 잠들었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낯선 환경,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학교에서 겨우 그 몇 시간을 버텨내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던 것 같다.


집 밖으로 나가는 모든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들을 마주쳐야만 하는

불안감이 상당했었나 보다


그때도 나름대로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에 집착해서

쇼핑을 잔뜩 하다가 싹 다 갖다 버리기를 반복하고

통제할 수 있는 행동에 집착해서

샤워 청소 식습관 같은 자잘한 일들에 예민했었다.




그래서 남편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하루에 세 번 네 번 샤워하는 것도

강박적으로 씻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거였던 걸 수도 있고,

하루 종일 날씨도 마음도 추웠을 텐데

뜨거운 물 맞으면서 있으면

하루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 알쥐 알쥐


독일까지 와서 외노자로 일하는 게 얼마나 짠하고 고마운가...

남편도 부담감 책임감 불안함 전부 느끼고 있었겠지.




나도 낯선 곳에서 더 쉽게 불안해져서

말이 예쁘게 나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편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조곤조곤 설명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까?


자잘한 행동에서 드러나는 상대의 불안함을

그때그때 영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면,

그래서 바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곰팡이를 보지 말고

사람을 보자

고작 샤워 한 번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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