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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19. 2023

늦여름 감기에 뜨끈한 북어죽 한 그릇

민간요법의 힘

지금의 장대한 기골을 보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처음 이 세상에 나올 때는 2.3킬로로 쁘띠 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자꾸 귀여움이 배어나오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 할머니는 분유를 엄청 많이 타주는 것으로 애 덩치를 크게 불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타고난 체질까지는 바꿀 수 없었는지 환절기마다 목감기를 달고 살고, 축농증이 생기고, 뛰면 심장이 아팠다. 그 바람에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짜디 짠, 그래서 더 아픈 소금물을 하루에 세 번 코 안으로 흘려 넣고, 비리고 깔깔한 간 녹두물 한 컵을 두 번 원샷했으며, 밤마다 양손 중지 손끝에 쑥뜸을 떠야 했는데 한 번은 제 때 떼지 못해 아직도 왼손 중지에 흉터가 남아 지문이 이그러져 있다. 


요즘 분위기 같으면 약간 아동학대맛 위험한 민간요법이었는데, 그래도 그 덕분인지 축농증은 사라졌고 (정말 축농증이었을까?) 별 큰 병 없이 살아있기는 한데, 아직까지도 감기는 자주 걸리고 조금만 피곤하다 싶으면 몸살이 오고 일 년에 한 번은 크게 체한다.


반면, 비쩍 마른 남편은 비실비실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잔병치레가 없다. 햇수로 삼 년을 알고 지내오면서 어디 아픈 걸 본 적이 없다. 아, 굳이 있다고 한다면 치ㅈ.... 앗, 여보, 아니야! 난 그냥 치자피즈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어! (*임실 치즈피자, 왠지 모르게 임실 치자피즈라고 읽게 됩니다.)


아무튼 튼튼한 남편이 주말 아침, 9시가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돈키호테에서 한국소주 새로(심지어 500엔이 넘어가는 날도둑 가격설정)를 손에 넣고 신나서 먹고 마시다 나는 거실에서 자고 남편은 방에 들어가서 잤는데, 숙취 때문에 못 일어나나 하고 방에 (구경)가보니 눈은 뜨고 있는데 이불속에 폭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열나잖아? 괜찮아?"

"나 목 아파.... 콧물도 나...."


이미 새로를 마시고 있을 때부터 목이 칼칼함을 느꼈다고 한다.

아니 이 양반아, 그럼 술을 마시질 말았어야지!

금방 괜찮아지겠거니 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쫓던 남편은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몇 년 만의 감기로 넉다운되고 말았다. 






얼음을 비닐주머니에 담고 찬물에 적신 수건에 돌돌 말아 이마에 얹어주고, 급한 대로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감기약을 먹게 했다. 약 먹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인데 군말 않고 꿀꺽꿀꺽 삼키는 걸 보니 진짜 몸이 안 좋긴 안 좋았나 보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밥 먹고 약 먹고 자고, 밥 먹고 약 먹고 자고를 반복했는데 일요일 아침에도 별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열은 37.3도였으니 고열은 아니었지만, 땀이 나지 않아 그런 건지, 아니면 평소 건강했던 사람인만큼 약간의 열로도 피로감이 상당했는지 평소의 장난기는 어디 가고 축 쳐져 있는 것이 영 안쓰러웠다. 


그리고 뭔가, 

엄마 여행 가셔서 혼자 남동생 돌보면서 엄마 기다리는 중인데, 내가 동생을 잘 못 돌봐서 잔병 모르는 튼튼한 아이를 감기 걸리게 한 상황에 누나가 느낄 수 있을 법한 묘한 죄책감이 들어 괴로웠다. 


(구 아들 담당자) 어머님, 죄송합니다.



그래서 뜨끈한 북어죽을 끓이기로 했다. 

우리 선조들의 민간요법-감기 걸렸을 땐 몸을 따뜻하게 하고 땀을 쭉 빼기-을 이번 남편의 여름감기에 적용해 보기 위해서다. 한주가 끝나 별 볼일 없어진 우리 집 냉장고지만,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은 구석구석 숨어있었다. 


우선 양배추, 피망, 가지, 파를 꺼내 잘게 썬 뒤, 자른 북어채, 간 마늘과 함께 참기름에 달달 볶았다. 재료들이 볶아져 한풀 숨이 죽었을 때 물을 붓고, 조개 다시다를 풀고, 불린 미역, 밥 두 덩이를 더해 간장, 소금으로 마저 간을 해가며 뭉근한 불로 보글보글 소리가 날 때까지 끓였다. 


그 사이, 물에 적혀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껍질이 벗겨지는 햇생강을 강판에 갈아, 한 스푼은 죽에, 한 스푼은 머그컵에 담았다. 머그컵에는 꿀, 레몬시럽, 뜨거운 물을 타서 레몬생강차를 만들었는데, 갓 갈아낸 신선한 생강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찬 울림을 가진 훌륭한 생강차였는데 네코지타(猫舌, 고양이 혀,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을 이르는 말)에 어린이 입맛을 가진 남편에게는 그 울림이 채 전달되지 않았다.


레몬생강차는 봉인되었다.  



죽이 다 끓어갈 즈음, 팬 한구석에 달걀을 깨 넣고 흰자만 겨우 익을 정도의 반숙으로 익혀 죽과 함께 떠 내었다. 남편도 주고 나도 한 그릇 먹는데, 부드러운 북어살에 꼬독꼬독한 양배추 줄기, 피망의 약간 매음한 향, 있는 듯 없는 듯한 가지, 매끄러운 미역이 어우러져 맛이 꽤 괜찮았다. 


뭣보다, 생선살 들어간 것에 조개 다시다를 넣고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지. 


몸이 안 좋을 때, 죽이 아닌 우동을 먹어오며 자란 남편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에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됐으니까 나만 믿고 먹으라고, 대신 선풍기 바람 쐬지 말고 더우면 부채질하면서 먹으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전날 선풍기 바람 종일 쐬고 찬물 마시고 했던 것이 회복을 막고 있는 것 같았기에) 죽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드디어 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남편이 갑자기 똘망똘망 해졌다. 어제는 그렇게 권했던 샤워도 기력이 없어 못하겠다더니, 알아서 씻고 오더니 열도 싹 내려갔다.


아니 그렇게 빌빌 거리던 사람이, 따끈한 죽 한 사발에 땀 한번 쭉 흘렸다고 갑자기 이렇게 좋아지나?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선조들이 해오던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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