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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8. 2023

한밤중의 핫케이크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넷플릭스에 드디어 펜트하우스가 돌아왔다.

올 초, 넷플릭스에서 황후의 품격을 보고 한국의 막장드라마에 눈을 뜬 남편에게, 같은 넷플릭스에 있던 결혼작사 이혼작곡을 팔아보려 했으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후의 품격 같은, 장면 전환마다 '어째서 그렇게?!' 같은 충격이 없단다. 성형하고 키까지 늘어난 캐릭터. 갑자기 사랑꾼이 된 잔혹한 황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의 향연과 그들이 빚어내는 한 치 앞을 읽을 수 없는 전개가 진짜 말도 안 되는데 눈을 뗄 수 없다며. 일본인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순옥드인 펜트하우스를 보여주려 했는데 분명 재작년엔 넷플에 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방영 계약이 끝난 것인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막장 드라마에서 돌아와 스토브리그를 보며 남궁민 배우를 팔았다. 잘 팔렸다. 좀처럼 배우 이름을 묻는 일 없는 남편이 이름을 묻고, 그가 나온다고 하면 어떤 내용인지 묻지도 않고 믿고 보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 그게 아니고, 펜트하우스.


펜트하우스가 넷플릭스에 돌아왔다. '이거 황후의 품격 작가가 쓴 거'라고 하니 남편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어제저녁, 맥주 한 캔씩을 들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아 이거지. 막장 드라마의 이 쫄깃한 맛. 3년 전 드라마지만 맥주가 금방 동이 났다. 이 술맛 나는 전개를 맨 손으로 맞이할 수 없어 쿄게츠 소주 (20도짜리 처음처럼)에 손을 내밀었다.


인간은 실수를 하지만, 지난 과오를 딛고 성장하기도 한다지.

얼마 전, 그 쿄게츠를 참이슬 잔에 따라 마시다 하루를 꼬박 숙취로 고생했던 우리는, 참이슬잔 대신 넉넉한 크기의 유리컵을 선택해 온 더락으로 마셨다.






술을 마시다 보면 단 것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쓴 술 한 모금에 달다구리 한 입. 엑, 그게 뭐야! 싶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잘 맞는다.


한잔을 다 비워냈을 무렵, 단 것을 내놓으라는 뇌파가 잡혔다. 집에 뭐 단 게 없나 찾아봤는데 없었다. 남편은 기회는 이 때라는 듯 '그러니까 과자를 사두면 이럴 때 좋잖아'라고 거들었다. 쟤는 집에 과자를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려고 하는 버릇이 있어 일부러 못 사게 하는 중이었다.


무슨 소리냐고 눈을 흘기다 핫케이크 가루를 떠올렸다.

한창 컵케이크 만들어 먹을 땐 중독된 것처럼 먹어댔는데, 막상 새로 다시 사두니 다 먹지 않고 묵혀뒀던 그 핫케이크.


"핫케이크 구우면 먹을 거야?"

"지금?? 이 시간에??"

"안 먹는다고?"

"먹을 거야"






이미 시곗바늘은 9시를 넘어섰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릇에 핫케이크 믹스와 우유, 달걀을 풀었다. 설명서에는 60번 저으라고 되어있었지만 일일이 세지는 않았고 얼추 다 섞였다 생각되었을 때,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반죽을 부었다.


'치이익-'


기분 좋은 기름 소리.

주방에는 금세 반죽이 익어가며 달달한 바닐라향이 퍼져 나갔다.


"사실 핫케이크 좋아해"


내가 핫케이크를 만드는 동안 설거지를 하던 남편이 조그마한 소리로 고백했다.


"핫케이크 좋아했어? 처음 듣는데"

"어렸을 땐 진짜 좋아했어. 특히 여기 이렇게, 그릇에 묻어있는 반죽을 콕 찍어 먹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게 느껴졌는데"


그의 반달 같은 눈이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지만, 나는 남편이 반죽을 찍어먹을까 두려워 반죽 그릇을 품에 안았다. 나중에 쿠키도우 먹으러 가야겠다. 근데 일본에 그게 있었나?




구운 반죽은 전체적으로 기포가 올라오면 뒤집어 준다.  

몇 년 전에 진짜 예쁘게 구워진 적이 있는데, 그렇게는 구워지지 않았다.


그게 이거랍니다. 예쁘죠?



잘 구워진 핫케이크에는 버터 (인 척하는 마가린)을 조금 올리고, 메이플 시럽 대신 꿀을 뿌렸다.

성인병을 부를 것만 같은 문제 많은 핫케이크였지만, 이 한밤 중의 핫케이크의 단맛은 술맛도, 드라마맛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아마 절대로 못 먹게 했을 테지만, 엄마의 눈을 피해 마음껏 먹고 마시느라 신혼 때 살이 찐다, 하는가 싶다.  






달콤한 밤이 지나고 오늘 9월 8일은 태풍 13호가 접근 중이다.

관동지방을 관통할 거라며 티브이에서는 설레발을 쳐댔는데, 이상하게 일본인들이 설레발 치면 꼭 별 일 없이 지나가더라고. 오늘도 그렇다. 설레발에 비해 빗줄기도 약하고 바람도 얼마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또 괜한 구실만 생겼다.


"비도 오는데, 돼지고기 넣고 김치찌개 어때?"


나와 만나기 전까진 '김치=매워서 못 먹는 음식'이던 남편. 요즘은 스스로가 김치를 찾을 정도로 입맛이 한국화 되었다. 나의 제안도 덥석 받아 물었다.


"그럼 펜트하우스는 잠깐 쉬고, 오늘은 소주 마시면서 너의 시간 속으로 보자. 그리고 디저트는 단 거, 어때?"

"좋아!"

"근데 단 거 뭐 먹지?"


핫케이크 가루는 어제 다 썼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바로 옆에 있던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퇴근할 때 맛있는 거 사 갈게 ^^"


남편은 어느새 아내의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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