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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8. 2023

남편의 점심 도시락


매주 금요일 아침에는 남편 도시락을 싼다.

월~목에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오니기리(주먹밥)를 남편이 만들어 가고, 비교적 시간에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금요일에는 도시락통에 밥과 반찬을 담아 들려 보낸다.


한 때는 매일 도시락을 만든 적도 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매일 그날그날 직접 조리한 반찬을 담았다. 그러다 평일엔 도시락 꺼내 먹는 것도 일이라는 남편의 리퀘스트에 이동하면서도 먹을 수 있는 오니기리를 만들고, 금요일에만 도시락을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점심을 굶고 일하는 남편에게 밥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한 도시락 싸기였다. 그런데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시간제한이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고, 아침 댓바람부터 비지땀을 흘리며 분주해하는 동안, 쓸데없이 일찍 일어난 남편이 잠옷바람 그대로 코타츠에 들어가 핸드폰 보면서 게으름 부리는 것이 보기 싫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잠을 더 푹 자던가, 출근준비라도 빨리 하고 쉬던가 하지. 아니면 직접 만들어 가던가.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여유를 지탱하는 나의 호의가 당연함이 되어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부부는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서로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의 역할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 나의 역할만 그에게 당연해져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아침잠 없는 그에게는 여분의 여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출근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날의 부부싸움을 계기로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더니 남편이 오니기리를 만들어 출근했다. 화해한 다음에도 아침에 움직이는 것이 그냥 멍 때리다 출근하는 것보다 좋다며 남편의 오니기리 만들기는 계속되었고, 내가 만드는 점심은 일주일에 한번이 되었다. 


 




독신시절, 딱 2개월 정도 다이어트 도시락을 싼 적이 있다. 점심은 이렇게 먹고 저녁은.......


나는 다이어트 할 때 말고는 나를 위한 도시락을 싸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 도시락이라 해도 두부 한모를 물기만 대충 털어가거나, 삶아둔 닭가슴살과 야채를 대충 담아가거나 했을 뿐이다. 집에서는 자고 나가기 바빠서, 정성 들여 도시락을 쌀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스토익한 점심식사를 해놓고, 저녁에는 일 때문에 화난다고 퇴근하자마자 그 길로 술을 마시러 갔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단 1그램의 감량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밥과 반찬이 있는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니. 도시락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던가. 주부라는 프레임이 나를 주부로 만들고, 전기세 100엔, 200엔에도 벌벌 떠는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만들고 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가끔은 그런 상황이 무척 짜증나고 갑갑하지만, 어떨 땐 노비들끼리의 인간관계에 스트레스 안 받고,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살고 있는 이건 이거대로 행복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도시락을 주 1회만 만들게 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뭐든 매일 하면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도, 가끔만 하면 어리벙벙 해진다는 것이다.

매일 만들 때는 몰랐는데, 가끔만 만드니까 이전에는 당연했었던 루틴을 깜빡 잊게 된다. 도시락통을 감싸 묶는 도시락 보자기를 잊거나, 점심마다 마시는 유산균 드링크를 깜빡하는 건 양반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 라인이 왔다.


'수저통 집에 있어?'


찬장을 열어보니 수저통을 통째로 넣지 않은 것이다.


'미안, 깜빡 잊었나 봐. 집에 있어.'

'괜찮아, 난 내가 어디 흘렸는 줄 알고'


나 스스로도 어이없던 실수였지만, 그 일로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기 때문인지 그 후로는 한 번도 수저통을 잊은 적이 없다.


그리고 금요일인 오늘.

전날 저녁에 만들어 둔 돼지고기 야채볶음을 데우고 계란찜을 만들어 김치와 함께 반찬통에 담았다. 흰쌀밥을 밥통에 꾹꾹 눌러 담고 뚜껑을 씌워 도시락 보자기로 감싼 뒤, 도시락 가방 안에 아까 도시락통들을 꺼낼 때 같이 꺼내 둔 수저통을 쏙, 유산균 드링크와 냉동실에 얼려둔 보냉제도 쏙.


완벽했다.




f


남편이 다 마신 커피컵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갈 때 내 시선이 그의 뒤를 따라간 것은 우연을 가장한 신의 한 수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주방 카운터 위에 놓아둔 도시락 가방이 시야에 들어왔고, 수저통을 넣은 기억은 나는데 그 안에 젓가락을 넣었는지가 아리송했다. 남편은 곧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다급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도시락 가방을 열고 수저통을 꺼내 들었다. 맙소사. 역시나 안은 텅 비어있었다.


"대박. 오늘은 수저통만 넣고 젓가락을 안 넣었어"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빈 수저통을 보여주며 황망하게 털어놓자, 남편은 '통만 있고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었으면 약 올리는 것 같아 짜증 났을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아, 그래. 그런 걸 요즘 말로 '킹 받는다'라고 하는데, 그 때 그 말을 알려주면 기억에 잘 남았을텐데.

당시엔 그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오늘도 무사히 도시락 싸기 임무를 완수했다.

잠시 뒤면 남편에게 토끼가 불쑥 튀어나오는 스탬프와 함께, '잘 먹겠습니다!'란 라인이 올 것이다. 항상 도시락을 먹기 전에 라인을 보내주고, 다 먹고 나면 잘 먹었다 맛있다 해준다.


도시락 만들 때는 시리얼에 우유를 붓거나, 커피 탄다고 남편도 주방을 들락날락할 때가 있는데 도시락 반찬은 가능한 한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른 채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는 게 꼭 보물상자 열어보는 것처럼 기대되고 즐겁다나. 돼지고기 야채볶음은 어제저녁에도 먹었고, 아침에 만든 계란찜은 물은 넣지 않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라텍스같이 되어버렸다, 고도 이야기 했으니 이미 정답은 다 알아버렸지만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우리 남편은 착한 사람 부류에 들어가는 것 같다.

이런 착한 애인데 아침에 늦장 부리면 킹 받고 도시락 스트레스 받는 내가 살짝 부끄럽다. 부끄러우니 이 글은 이쯤에서 후다닥 마무리를 짓겠다. 끝. 



사족. 도시락 겨우 주1회 싸면서 생색내려고 쓴 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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