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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5. 2023

몰래 홀짝 하는 재미

내 나이 6살, 할아버지 산소에서 장난 삼아 건네진 소주 한잔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한 번에 깨끗하게 비워냈을 때, 그 자리의 그 누구도 아이의 숨겨진 재능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3쯤 되었을 무렵,  엄마 아빠는 버스에서 웬 여학생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있는 것을 본 것이 발단이 되어 저녁 반주 자리에서 가끔 한잔 정도 개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술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끼리 술을 배워 정도도 모르고 마시는 것보다야 어른에게 술을 배우는 것이 낫다는 것, 그리고 아주 못 마시는 것보다야 마실 수 있지만 안 마시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타고난 주당인 줄도 모르고, 쓸데없는 조기교육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쓸데없다고는 했지만 밥상머리 조기교육의 성과 덕분인지, 진짜로 몰래 술을 먹고 들어왔을 땐 가족들 그 누구도 나의 음주를 알아채지 못했다. 후각이 좋은 강아지가 두 마리나 있었는데도, 그들에게 있어 숨결 속 흐릿한 술냄새는 저 인간 집사들이 저녁마다 풍기는 '일상의 저녁향'같은 것이었는지 언제나와 다른 기색 없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 이게 되네?


자신감은 붙었지만 술은 저녁 밥상에서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이라 굳이 조마조마한 스릴을 느껴가면서까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음주에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고서도 술이 좋다기보다 술자리가 좋아 술을 마셨다.


그랬던 내가, 일본에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는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 되고야 말았다. 낮에는 하도 복장 터지는 일이 많아서, 집에 와 안주를 만들고 술을 마시는 그 시간이 없으면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은 브런치를 겸해 소주에 아주 맵게 끓인 신라면을 먹기도 했다. 한병 정도 마신 뒤 침대에 풀썩 쓰러져 깊은 잠을 자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주섬주섬 일어나 다시 술상을 차렸다. 평일 저녁에 홀짝홀짝 마시던 맥주 한 캔은 금방 소주 반 병으로, 또 맥주 한 캔'과' 소주 한 병으로 점점 더 불어났다.






알코올중독자 같던 술버릇을 깨끗하게 끊어낸 것은 나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었다.

출근을 그만두고 주부가 되자 직장 스트레스가 없어져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낮이든 밤이든 집에 있으면 자연스레 냉장고 안 차가운 맥주에 손을 뻗었을 텐데, 지금은 평일, 혼자 있는 시간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역시 퇴사는 만병 통치약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가끔 혼자 있는 낮에 술이 마시고 싶어질 때가 있다.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우울감을 털어내고 싶을 때나, 시간이 걸리는 요리나 대청소를 끝냈을 때. 약간의 보상처럼 나에게 술 한잔 따라주고 싶은 기분에 그런 것 같다. 오늘은 양쪽 다였다.



요 삼 일간, 꿈자리가 영 뒤숭숭했다.

어떤 날은 깰 때마다 새로운 악몽을 꾸어서 하룻밤 사이 악몽을 3개나 연달아 꾸기도 했다. 밤에 푹 잠을 자지 못하니 한번 일어났다가 오전 늦게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하기도 했고, 그런 사이클이 싫어 오늘은 아침부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냉장고 정리다, 욕실 청소다 분주히 움직였다.


저녁에는 초계국수를 내놓을 생각이라,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닭고기를 녹이려고 꺼내려는데 구석에 좀 오래 묵은닭고기 한 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얘를 어쩔까 하다 다른 고기들 옆에 조그맣게 자리를 내어, 일단 식초와 미림에 번갈아 재워 잡내를 잡았다. 올여름 제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내가 기특하니 오늘은 이 닭고기를 안주 삼아, 점심에 몰래 그레이프후르츠 사와를 마시기로 했다.


소금과 후추를 섞은 전분옷을 입혀 앞뒤 노릇노릇하게 구운 닭고기구이에 통후추 챱챱. 옆에 허니 머스터드소스를 동그랗게 짜니 계란 노른자 같이 귀여웠다. 안주 겸 입가심으로 오이지를 송송 썰어 놓았더니 노랗고 파란, 꽤 근사한 원 플레이트 안주가 되었다.



그레이프후르츠 사와는 지난번에 리큐르 원액을 사다 놓은 것이 있어, 얼음 넣은 컵에 리큐르를 붓고, 소다수를 콸콸 따라 저어주면 금방 완성된다. 아직 국수 고명할 닭고기들을 삶고 있는 때라 한잔, 딱 한잔만 마셨다.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이 날씨도 좋아 더더욱 청량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마시던, 그 까마득한 심연에서 기어 나오려고 마시던 눈물겨운 낮술이랑은 또 전혀 다른 맛.


홀짝홀짝, 냠냠.


게눈 감추듯 먹고 마시고 컵과 접시를 씻었다.

오늘은 설거지를 대체 몇 번을 했을까.


뽀득뽀득 다 마른 접시를 마지막으로 찬장에 되돌려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각또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남편은 내가 기분전환으로 술을 마시는 걸 뭐라고 하지 않지만, 이 더운 날, 사람 일 내보내놓고 퇴사는 만병통치 운운하며 팔자 좋게 낮술을 마셨다는 건 어지간하면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 양심에 찔려서.


이제 '발행' 버튼을 누르면 완전 범죄다. 후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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