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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29. 2023

김치를 담그려던 무는 무 스테이크가 되었다

입추도, 처서도 지나 더위가 한풀 수그러들고 가을을 준비할 시기임이 분명한데도 어찌 된 일인지 8월 말, 37도까지 육박한 더위에 맥을 추지 못하고 얼음을 가득 담은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와서 소파에 한참을 늘어져 있었다. 이런 늦더위, 일본에서도 잔쇼(残暑, 가을까지 남은 더위)라 부르는 걸 보니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쨌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건 엇비슷한 것 같다.


더위 탓인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작은 다육 하나가 완전히 고꾸라져 있었다. 한여름엔 물을 못 마시는 것 같아 좀 선선해지면 물을 주려고 눈치만 보던 중의 일이었다. 물을 줘도 되나 싶어 얼굴에만 물을 한번 칙칙 뿌려주고, 이쑤시개를 부목 삼아 대 주었더니 어찌어찌 서 있기는 하는데 영 시들시들하다.


마치 나처럼.






요즘 금토일 홈파티에 흠뻑 빠져 있다는 글을 썼는데 그게 브런치와 다음 메인에 올라갔다. 더욱더 파티의 당위성에 힘이 실려,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던 남편의 양손에는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더 묵직한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보따리의 위력은 대단했다. 파티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란 예상은 했다) 

마침 아주 더웠고 냉장고에는 차가운 맥주가 줄지어 있었다.


"나를 마셔요! 나를 마시세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들려오는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나는 냉장고 문을 황급히 틀어막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이걸 마셔? 말어?'를 연달아 고민하다가 결국은 손을 뻗고야 말았다.


오후가 되기도 전에.





맥주는 맥아와 홉으로 만들어져 색깔도 노랗고 탄산도 보글보글한데, 왜 이렇게 물처럼 잘 넘어갈까. 아니다, 진짜 물 같으면 물물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술이니까 술술 넘어가나.


특히 더운 여름날, 바깥에선 뙤약볕이 내리쬐는데 방에 에어컨 틀어놓고 마시는 차가운 맥주와 노릇노릇한 군만두 맛이란! 마음이 즐거우니 잔을 드는 손도, 젓가락질도 부지런해진다. 군만두는 폰즈나 간장+식초+라유에 찍어먹어도 맛있지만 식초에 후추를 타 찍어 먹어도 깔끔하다.


기름진 만두를 식초에 살짝 적셔 한입 베어 물고,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과 마늘향을 음미하다 맥주로 입을 가시고 그 짜릿한 목넘김을 즐기고 있노라면, 신선놀음이 뭐 별 건가, 시원한 데서 기름진 거 먹고 맥주로 목 축이는 거, 이게 신선놀음이지.


하지만 부지런한 젓가락질에 남아나질 않은 군만두. 알딸딸한 기분으로 홀연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술을 마시면 계속해서 뭘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냉장고에 뭐든 있으면 꺼내서 볶든 찌든 하려는데 냉장고 문을 열어볼 새도 없이, 싱크대 위에 나와 있던 무가 눈에 띄었다. 김치 하려고 사 왔는데 냉장고에 넣을 곳도 없어 그 옆 종이상자에 대충 방치했던 무. 이러다 통째로 무말랭이가 될 것 같아 오늘은 꼭 담그겠다며,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 올려둔 것이었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느라 또 그렇게 은근슬쩍 방치되고 있었다.






우리 집 식재료에는 서열이 있다.


가장 상위 A랭크는 '쓰임새와 그 양이 명확한 재료', 그다음 B랭크는 '이번 주 2-3개 정도의 요리에 돌려 쓸 생각으로 넉넉하게 산 재료', C랭크는 '딱히 뭘 하려고 마음먹고 산 것은 아니나 장기보존이 가능하여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재료'. 


각각 예를 들자면,


A랭크 - 당장 오늘 수육으로 만들 돼지고기 블록, 내일 저녁에 먹을 임연수

B랭크 - 내일, 모레 저녁 샐러드와 금요일 도시락에 넣을 치킨 토마토 볶음에 들어갈 토마토, 간장계란과 볶음밥에 쓸 계란, 이번 주 어느 저녁에 두 번 정도 볶아먹을 양의 돼지고기

C랭크 - 신라면, 참치, 깡통햄, 우동 건면


이런 식이다.


A랭크의 재료는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구매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술상에 안주가 떨어졌을 때나 출출할 때 먹는 간식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집 불문율이다. 보통은 당장 이번 주 식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C랭크나 비교적 이용이 유연한 B랭크의 재료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날 나의 사고는 약간 고장 나 있었다. 눈에 무가 보이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무를 손에 들고 껍질을 필러로 벗기고, 세로로 뎅강뎅강 자르기 시작했다.


무는 A랭크.

배추김치 안의 무생채가 될 예정의 '쓰임새와 그 양이 명확한 재료'였다.




김치를 담그려던 무는 무 스테이크가 되었다



그렇게 김치를 담그려던 무는 무 스테이크가 되었다.

잘 해 먹지도 않는 그것이 왜 생각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술은 인간의 충동을 부채질하고 상황판단을 흐리게 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취한 와중에도 김치는 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무 꼬랑지 1/3 정도를 남겨둔 것과 무를 굽는 사이 나머지 1/3과 배추를 썰고 절여, 술 마시는 중간중간 왔다갔다 하면서 김치를 만든 것이다. 취중김치라니, 장하긴 한데, 이번 우리 집 김치는 '배추배추배추배추배추무생채배추배추배추배추'라는 황금비율로 만들어졌다. 비슷한 방식으로 '두부 없는 두부 미소시루', '고기 없는 고기야채볶음'을 탄생시켜 왔던 것을 생각하면 '무채 없는 김치'는 면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피해는 김치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계속된 부어라 마셔라. 정신을 차려보니 소중히 아껴왔던 냉장고 속 마지막 초록병은 물론이고,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페트병 소주가 등장했다. 저녁식사 후에 얼음 담은 컵에 한잔 따라서 티브이 보면서 야금야금 마시기 좋고, 부부 둘이 마실 때에는 도중에 술이 떨어질 불안감도 없어 한 병씩 놓아두면 요긴하게 쓰는 데다가 겉모습은 낯설어 보이지만 사실은 20도짜리 한국 소주 '처음처럼'이다.


그 20도짜리 술을, 참이슬 마시던 소주잔에 그대로 콸콸 따라 딱 두입에 홀랑홀랑 마시다 보니, 그것도 이미 맥주와 참이슬로 버무려진 몸이 남아날 리가 없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 날은 부부가 저녁 5시까지 앓는 소리를 하며 누워있었다. 겨우 기력을 차리고 나니, 이번엔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자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해 수면부족이 되어버렸다. 집에 있는 사람이 무슨 수면부족이냐 싶겠으나, 사람 내보내 놓고 나 혼자 재밌게 취미생활 하면서 집안일도 하려면 낮에 잘 틈이 없다. 하지만 집중을 할 수 없어 어제는 끝내 글을 쓰지 못했다. 정작 밤에는 티브이 본다고 늦게까지 깨어있느라 수면부족도 계속되고 있다. 그만 시들시들하려면 어떻게든 생활패턴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아냐. 그보다도 적정량의 음주와 올바른 음주시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 그런데 왜 자꾸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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