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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14. 2023

바야흐로 코타츠와 나베의 계절

가을이 걷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코타츠에 이불을 끼웠다.


테이블에 히터가 달린 일본의 난방기구, 코타츠.

만화나 영화에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악마의 난방기구'로 묘사되곤 하는 그것. 그 안에 들어가 귤도 까먹고 그림도 그리고 정종도 따끈하게 데워마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언제 이 나라를 떠날지 모르는 이방인. 더 이상 큰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무려 '온돌의 나라'에서 온 대륙인(반도지만) 아니던가? 고작 테이블에 이불 끼우고 그 안에 히터 틀어 국소적인 따스함만 취하는 섬나라의 일차원적인 난방기구에 만족할 순 없다는 이상한 프라이드도 있어, 코타츠와는 여전히 거리를 유지한 채 10년이 흘렀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이 나라를 쉽게 못 떠나게 되고) 거실에 놓을 테이블을 찾다가, 끼니 때는 밥상, 낮에는 책상, 술 마실 땐 술상, 겨울엔 따뜻상(?)을 명목으로 코타츠를 들여놓게 되었고 이후 우리 집 코타츠는 일 년 내내 쉴 틈 없이, 올타임 대활약 중이시다.


난방기구 이외의 역할로.





일요일,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벽장에 잠들어 있던 코타츠 이불을 꺼내왔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 가을인데 걸음은 또 어찌 그리 빠른지, 벌써 저 멀리 훌쩍 가버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엔 금붕어 똥 같이 붙어 딸려온 겨울만이 너풀거리고 있다.


지난 겨울엔 연료비 급등으로 전기세 폭탄을 맞았다. 그래서 우리 집 코타츠는 전기선을 뽑고 '밥상 겸 책상 겸 술상 겸 이불꽂이'가 되었는데, 이불만 있어도 어느 정도 웃풍은 막을 수 있고, 그 안에 유탄포까지 넣어두면 꽤 훈훈하게 데워져 한겨울도 꽤 지낼만한데다, 기분만큼은 그냥 코타츠에 앉아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올해도 이렇게 쓸 것이다.


코타츠 이불을 세팅하는 데는 부부 두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코타츠 상판을 고정시킨 너트 두 개를 풀고, 한 사람이 상판을 들어 올리면 다른 한 사람이 상판과 코타츠 본체 사이에 이불을 사샤샥 밀어 넣고 자리를 맞춘다. 다시 상판을 내려 고정시키면 겨울나기 준비 끝. 코타츠 이불이 거실에 들어오면 빵이나 과자 같은 거 먹다가 이불 위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더 조심조심 먹어야 한다는 불편함은 늘었지만 그래도 뭐 어떠랴. 따뜻하면 됐지.


그렇게 코타츠 이불을 개시하고 앉아있자니 문득 국물음식 생각이 났다.

날이 쌀쌀해지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따끈한 국물에 차가운 소주 한잔. 마침 냉동실에는 어젯밤에 넣어둔 걸 까먹고 밤새 꽁꽁 언 이슬이가 있었다. 이건 잘못 녹이면 터질 수도 있으니 빨리 마셔서 없애버려야 해!


발견 당시의 참이슬


얼어붙은 참이슬을 조심조심 냉장실로 옮겨 넣고 마트로 향했다.

오늘은 생선을 넣고 슴슴한 요세나베를 끓여낼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담백한 대구살부터 장바구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연어 하라스가 싸게 나와있었다. 하라스는 연어의 볼록한 배 부위인데 살이 크고 기름지다. 전에 한번 구워 먹어 봤다가 기름기가 많아 먹다 질렸던 기억이 있는데, '나베에 넣어도 좋아요!'란 팝업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혹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하니 진짜 그런가 궁금해지기도 해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올 시즌 첫 나베


장보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큼지막한 냄비에 물부터 끓였다.

물이 끓는 사이 생선살이 바스러지거나 야채가 물컹거릴까 봐 재료 넣는 타이밍을 찾아봤는데, '수프가 끓기 전부터 재료를 넣으면 수프에 재료의 맛이 녹아들어 맛있고, 수프가 팔팔 끓고 나서 재료를 넣으면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어 맛있다'라는 답을 보았다. 넣는 순서는 상관없으니 그저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것이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당당한 자세로 (그저 맛있게 먹으면 된다니깐) 간장, 미림, 혼다시로 간을 하고, 큼직하게 썬 배추와 양파, 대파를 퐁당퐁당 넣고 끓이다 대구, 연어 하라스, 만가닥버섯, 두부, 꼬치에 끼운 고기완자를 올려 한 김 파르륵 끓였다. 가스불의 열기와 몽글몽글 피어오른 김이 거실 전체에 훈훈하게 퍼져나갔다.


추운 날엔 따뜻한 국물, 그리고 소주 한잔


완성된 나베는 냄비 채로 옮겨, 건더기를 한국자 크게 담아내 맛을 보았다.

처음 나베에 넣어본 하라스는 신의 한 수였다. 담백한 재료들 틈에서 연어 특유의 감칠맛에 기름진 하라스의 부드러움이 배가되어 이 맛은 정말이지....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 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자문자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아줌마는 나밖에 없으므로.





 

건더기를 다 건져 먹은 뒤, 마지막으로 통통한 우동 생면을 넣어 끓여 먹는 것까지.

오랜만에 탄지단 삼영양소에 식이섬유까지 균형 있게 섭취한 나와 남편 두 사람은 두 번째 참이슬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고 야무지게 마셨다. 쨍하게 식힌 소주라 그런가, 국물이랑 같이 털어 넣어서 그런가, 손발이 따끈하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있을 뿐 눈이 게게 풀릴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요일 저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역시 추운 계절엔 코타츠에 앉아 따끈한 국물, 그리고 소주라니까.


내일이면 11월도 딱 절반이 지나가고, 앞으로는 더 추워질 일만 남았다.

지구온난화라며, 아니 온난을 넘어 지구가 끓고 있다며 겨울은 왜 이리 빨리 오고, 길게 머무는지 모르겠지만 올해도 무탈히, 그리고 건강히 새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따뜻하고 풍성한 매일을 궁리해 봐야겠다.


나는 우리 집 아줌.. 주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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