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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17. 2023

오늘 여주 먹는 고야?


"짜잔!"


퇴근해 돌아온 남편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안에는 푸릇푸릇한 여주가 여섯 개, 쬐끄마한 꼬마 가지가 네 개 들어있었다. 


농가가 많은 지역 특성상 여기저기서 채소를 선물 받을 때가 많다. 겉에 상처가 나 출하가 어려워진 것이나 너무 풍작이라 남아도는 것, 또는 그냥 선의로 등등, 돈 주고 사 먹는 것보다 훨씬 싱싱한 계절 야채를 공짜로 받아먹을 수 있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 


게다가 여주라니. (일본어로는 ゴーヤ, 고야라 부른다)


며칠 전에 오키나와의 여주 요리인 고야참플이 먹고 싶어 져서 조만간 주말에 만들어 먹자는 이야기를 스치듯 했었다. 누가 듣기라도 했나.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다. 일본 사람들은 코토다마(言霊, 언령)라 해서, 말에도 영력이 깃들어 있으니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 속담의 말이 씨가 된다랑 비슷한 개념인데 이 기세를 몰아 나의 원대한 꿈도 지금부터 끊임없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볼까 한다. 



나는 올해 연말점보(복권)에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1등으로 당첨될 것이다 

(다으다으다으) 




꿈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오돌토돌 못생긴 여주를 반으로 갈랐다.

가르자 마자 씁쓰름한 풀내음이 난다. 어렸을 때 같으면 왜 이런 쓴 걸 먹느냐고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은 어째서인지 가끔은 쓰고 신 것도 별미라고 찾게 된다. 



안쪽의 하얀 부분과 씨는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내고 껍데기만 반달모양으로 송송 썰어준다. 이 쓴 열매를, 또 속은 파내고 겉껍질만 먹다니 옛날 사람들의 발상은 참 오묘하다.


소금에 10분 정도 절이고, 물에 살짝 데쳐서 요리하면 쓴 맛이 많이 줄어들다 하여 썰어둔 여주는 일단 소금에 절여놓고 보존기간에 대해 조사했다. 일상적으로 매일 먹는 야채도 아닌데 6개나 있으니 자칫하다간 냉장고 안에서 썩힐 수도 있다. 얻어온 것이라고는 하나 해와 비, 바람, 땅, 그리고 사람이 정성을 다해 기른 것을 버릴 때의 죄악감은 주방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이다. 가스레인지 위의 기름때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냉장상태에서도 1주일 이내로 소비하는 것이 좋다 하여, 당일은 간단한 술안주를 만들었다.

팔팔 끓는 물에 데친 여주와 기름기를 뺀 캔참치, 데친 비엔나소시지, 마요네즈, 참기름, 설탕, 후추를 넣고 섞어주면 씁쓸하고 달고 고소한 여주 샐러드 완성. 독특한 어른의 맛이었다. 



또 어느 날은 이렇게 돼지고기, 계란과 함께 볶아 고야참플틱하게 만들어 보기도 했다. 

간장과 설탕, 소금으로 심플하게 볶았는데 모양새는 예쁘지 않지만 한 끼 반찬으로도 안주로도 그만이다.


지난 9월, 그 주는 한 주에 세 번이나 여주 요리를 만들어 먹었는데, 그 독특한 쓴맛에 길들여졌는지 쓴맛 없는 보통의 요리들이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먹는 여주의 별미가 며칠 사이 내 입의 보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보통이란 대체 뭘까? 보통이 아닌 걸 자꾸 하면 그게 보통이 되는 걸까. 


그래. 보통이 되도록 다시 한번 말해보자.


나는 올해 연말점보(복권)에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1등으로 당첨될 것이다 

(다으다으다으) 


꼭 이루어 지기를.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 겨울 입구에야 발행하게 된 글이지만, 여주는 사실 더운 여름이 제철인 열매채소다. 당분간은 먹을 일이 없겠지만 이 글을 다시 훑어보며 그 맛을 다시 떠올리는 사이 입안에는 자연스럽게 침이 고여왔다. 감기 예방에도 좋다 하니 내년에는 말려서 이 계절에 마실 차로 만들어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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