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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24. 2023

맛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비슷한 것이 자꾸 상에 올라오는 이유

지금까지 기억이 나는 일이니 아주 오래전의 일은 아닐 것이다.

생각은 얕지만 머리는 굵어진, 아마 대학생 즈음의 일로 추정된다. 당시 내게는 '엄마의 요리가 맛있을 때에는 맛있다는 말을 여러 번 하지 말 것'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맛있다고 여러 번 칭찬하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몇 날 며칠을 같은 음식이 계속해서 상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많이 만들었다가 계속 준 것이 아니라 맛있다고 해서 일부러 재료를 사다 또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음 날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은 아무리 산해진미라 해도 물리고 지겨워진다.


"아무튼 엄마한텐 뭐 맛있단 소리를 못한다니깐."


그땐 우스갯소리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제는 엄마의 마음을 좀 알 것 같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항상 먹는 이의 반응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기껏 만들었는데 맛없다 하면 어쩌지? 맛없다고 안 먹으면 어쩌지?


그래서 맛있다고 하면 자꾸 만들게 되는 것이다.

더 먹이고 싶고, 기왕이면 맛있게 더 먹이고 싶어서.

맨날 요리를 만들다 보면 참신한 레퍼토리도 떨어져서 더 그렇게 된다.


 




일본인의 가정식.

사 먹으러 가도 그렇고, 일주일 식단을 유튜브로 엿보아도 그렇고, 미리 만들어 두고 꺼내먹는 밑반찬류가 한국보다 발달하지 않은 대신, 가정요리에도 양식의 영향이 크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즘이야 엄마가 만들어 준 집밥에 양식스러운 음식이 나오는 일도 있겠지만, 라떼는 계란물 입혀 구운 소시지가 제일 특이하고 맛있는 반찬이던 시절이라, 자 이제 저녁을 만들어 보겠어요 하는 타이밍에 내가 집에서 먹지 않던 메뉴의 레시피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남편은, 분명 학년 1개밖에 차이 안 나는데 어릴 때 집에서 파스타를 해줬다느니, 함박스테이크를 해줬다느니 해서 정서적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기사, 한창 식민지로 수탈되고 있을 시절부터 이미 여기는 일본식 경양식이 유행했다는 걸 생각하면 8,90년대 가정식에 양식요리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다만, 우리 시어머니는 집에서 가족을 위한 밥을 안 하신 지 10년이 넘었고 (정확히는 본인 거만 만드심) 시가에 갔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내보내지기 때문에 남편이 어릴 때부터 집에서 파스타나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는 소식에  엥? 그 어머니가 밥을 해주셨다고? 뻥 아님?이라고 솔직히 나는 밥이 나왔다는 거 자체에 깜짝 시어머니가 그 시절, 내 기준 그런 젊은 메뉴를 만들어 주셨다는 게 쉽게 상상이 가지 않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만들 요리 레퍼토리도 떨어졌고, 남편이 양식을 좋아한다고도 하길래, 그리고 집에 우유와 밀가루가 있어 크림소스가 들어간 양식풍 요리에 도전해 보았다. 



닭고기, 양파, 시금치


이 날 만든 요리는 닭허벅지살과 약간의 야채, 우유와 밀가루를 사용한 닭고기 크림소스 조림이다.

먼저 닭허벅지 살을 한입 크기로 자른 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닭껍질이 바닥에 가게 해서 굽다가 양면이 다 노릇하게 구워지면 양파와 시금치를 넣고 볶는다. 


요리 과정


양파가 투명해질 즈음, 밀가루를 두 스푼 넣고 요리 젓가락으로 저어 재료들에 골고루 묻힌 뒤, 우유를 200미리 정도 부어주었다. 밀가루를 재료에 묻히지 않고 바로 우유를 부으면, 밀가루가 덩어리 지기 때문에 나중에 덩어리 풀어주느라 번거로울 수가 있다. 약불로 저어가며 끓이다가 콘소메 과립을 반스푼 정도 넣고, 간이 부족하면 소금 간을 해준 뒤, 우유가 걸쭉해지면 잘게 자른 슬라이스 치즈를 한 장 찢어 넣고 녹을 때까지 끓여주면 끝이다. 양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손이 많이 갈 것 같고 복잡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닭고기 야채볶음과 거의 다를 바 없는데 뭔가 특별해 보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잘 기억해 뒀다가 앞으로도 자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완성된 닭고기 크림소스 조림



평평한 접시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쌀밥을 얇게 퍼담고 그 위에 얹어 오븐에 구우면 크림소스 도리아가 될 것이고, 익힌 파스타 면 위에 부으면 크림소스 파스타가 되겠지만, 이 날은 밥 위에 얹기만 하는 돈부리 스타일로 먹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고소하고 찐득한 크림소스가 평소와는 다른 식감과 맛으로 입 속에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고 포만감도 상당했다. 다행히 남편도 입에 맞았는지 맛있다 맛있다, 자꾸 맛있다고 해주길래,  


맥 앤 치즈


한주가 다 지나기 전에 또 크림소스 요리에 손을 대고 말았다. 


좀 늦은 점심이라 와인과 함께 마시기 위해 만든 맥 앤 치즈는 닭고기 크림소스 조림과는 공정이 조금 다르다. 밀가루를 버터에 볶아 먼저 루를 만들고, 우유, 콘소메 과립, 소금을 부어 소스를 만들었다. 지난번처럼 다른 재료에 묻히는 게 아니라, 체에 한번 친 밀가루를 고르게 살살 뿌려줬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봉투 채로 탈탈 털어 넣는 바람에 덩어리가 잔뜩 생겨 나중에 스푼으로 다 눌러 풀어줘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는 것을 이미 한 352번째 정도 몸소 체험했던 것도 같은데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나쁜 건 고쳐지지 않는가 보다)


소스가 만들어지면 삶은 마카로니, 자른 비엔나소시지, 슬라이스 치즈를 넣고 약불로 끓이다 파마산 치즈와 파슬리 가루, 통후추를 뿌리면 끝인데 맥 앤 치즈를 처음 먹어본 남편은 굉장히 좋아했다. 아무래도 얘는 진짜 크림소스 좋아하나 봐. 마카로니로 빵빵해진 볼로 눈을 초승달처럼 뜨고 오물오물 먹는 걸 보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더 먹고 싶어질 것 같다길래 옳다구나 그 자리에서 한판 더, 마카로니를 더 많이 붓고, 소스를 더 진하게 만들어 줬더니 막판엔 숟가락질이 점점 느려지더니만 그 이후 남편은 크림소스의 'ㅋ'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스틱형으로 잘라 약하게 토스트 한 식빵도 찍어먹고 


어제는 집에 온 남편 앞에서 파스타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한 눈빛으로 '무슨 소스로 할 건데?'라고 물어왔다. 마늘과 시금치, 시푸드 믹스로 오일파스타를 하겠다 하니 그제야 안도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뭔 말을 못 하겠다던 그때의 내 핀잔이 조만간 내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도중, 부메랑을 물리칠 멋진 (그리고 낯 부끄러운) 대답이 떠올랐다. 


'한번 맛있다 하면 자꾸 만들고 싶어지는 심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하나일 거야. 엄마에게서 내게로, 나에게서 또 너에게 전해지는 그런 사랑 말이야'


꺄아아악.

나까지 물리쳐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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