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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28. 2023

눈썹 없이 가는 한국

눈썹 그리는 걸 잊어버렸다.


집을 나서려는데 ‘그 티셔츠로 정말 괜찮겠어? 그게 최선이야?’ 라 묻는 남편의 말이 마음에 걸려, 바지를 갈아입느라 반토막 밖에 없는 눈썹에 그림 그리는 걸 깜빡 잊었다. 티셔츠는 이게 최선이라서 어벙벙한 바지 말고 핏 되는 스트레이트 진을 입으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그랬다.


눈썹이 생각난 것은 역으로 가는 차 안.


눈썹연필은 트렁크 안 작은 가방, 그 더 안쪽 파우치에 고이 들어 있었다. 공항 패션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예쁘게 단장하고 간다는 해외여행이지만 나는 그저 집에 가는 것뿐이니 해외여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눈썹 없이 내추럴하게 가도 된다, 공항은 동서울 버스 터미널 같은 것이다 하며 남편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역 엘리베이터 안 쪽으로 사라져 내가 그를 볼 수 없을 때까지 출발하지 않았다. 짜슥, 울컥하게 왜 그래.

 

서로를 알게 된 후, 가장 오래 떨어져 있게 된 삼 주간. 그는 눈가가 촉촉해지다가도 근처 사는 회사 동료 아저씨랑 교자바에 마시러 갈까 말하며 눈을 빛냈다. 너도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구나. 나도 구슬픈데 짱 기뻐! 뭘까? 이런 왔다 갔다 기분.




사실 어제는 한국 가는 걸 시가에 연락을 하니 마니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인 며느리라면 안 해도 되는 것을, 친정이 외국이라 해야 한다는 논리는 내겐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고, 평소에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다 보고할 만큼 친밀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친밀은커녕, 만날 때마다 티 안 나게 쪽 주고 식모처럼 대해서 존빡... 안돼!! 브런치에선 시어머니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 근데 은근 쌓였는지 두 글 연속 자꾸 이런 소리가 나오네 허헙.


아무튼 이번 일만으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본인 엄마가 본인에게는 좋은 엄마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저 모두 다 같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내게 요구했던 것들을, 본인 엄마에게도 이야기했었어야 한다고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허공에 손만 휘적거리다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족이지만 혈연으로 묶여 있지 않으니 더더욱 적당한 거리감과 상호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남편이 동의하고 늦게나마 내 입장을 헤아려 준 것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사이좋게, 마지막 밤은 소주를 서너 잔 나눠 마셨다. 김치도 새로 담그고 고기볶음은 일부러 많이 만들어 두었으니 오늘내일 끼니는 괜찮을 거다.




오랜만에 전철에 타니, 오랜만에 사회에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던 때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다. 줄지어 선 사람들을 지나치고 빈자리에 서서 트렁크의 손잡이를 밀어 넣었다. 전철이 오고, 트렁크를 들어 전철에 오르고 자리에 앉아 트렁크를 발로 지지한 채 눈을 감았다. 어제 고양이 게임을 하다 잠들었는데 화면이 꺼지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핸드폰이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충전 케이블에 연결하고 겨우 60%까지 끌어올렸지만 배터리 성능이 좋지 않아 공항까지의 세 시간 반은 야금야금 아껴 써야 한다.




한참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목적지까지 1/3도 가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어디선가 장미향 같은 화장품 냄새가 난다. 실눈을 뜨고 보니 옆자리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무색무취, 청소용 락스냄새, 요리 냄새에만 익숙해 있다가 오랜만에 맡는 화장품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우면서도 반갑게 느껴졌다.


집에서는 좀처럼 써지지 않는 글이, 흔들흔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사람들의 냄새와 체온, 소리에 뒤섞여서 술술 써진다.





오늘은 일부러 시간 여유를 크게 두고 나왔기 때문에, 스카이라이너가 아닌 케이세이선으로 공항에 가고 있다. 세 번을 갈아탔는데 운 좋게 세 번 다 타자마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예전엔 지금 탄 이 열차가 내 퇴근 열차였다.

야치요다이 역 도보 2분 1 LDK 한 달 월세 5만 3천 엔짜리 맨션. 회사 근처에 있던 전 집보다 12000엔 싸고 통근거리가 99배 늘어났던 집. 일본생활 5년 차에 가장 외로웠던 그때, 코딱지 만한 집에서 이사와 변변한 가구조차 없던 넓기만 한 집에서 혈혈단신 외국인 노동자인 나는 참 많이 쓸쓸해했고, 그만큼 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공항 역에 도착하고 터미널로 향하는 길.

여기도 가챠 스탠드가 생겨 있었다. 일본의 신사 모양을 본뜬 캡슐 쓰레기 버리는 곳. 관광객이 아닌데도 신기하다.


지갑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해 교통카드에 교통비만 넣고 그거랑 신용카드만 달랑 들고나가려는데 남편이 불안하지도 않냐면서 돈을 쥐어주었다. 근데...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이런 게 하고 싶네, 하하하. 하지만 나가는 길에 작게라도 짐 늘리는 게 싫어 꾹 참았다.


그리고 무사히 터미널에 도착해, 카운터는 열렸지만 짐은 좀 나중에 부치려고 근처에 앉아 대기하면서, 오는 길에 메모장에 틈틈이 써두었던 것들을 브런치에 옮기는 중이다. 브런치 어플이 붙여 넣기가 안 되는 걸 알았더라면 직접 썼을 텐데, 이렇게 메모 보면서 손으로 옮겨 써야 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오늘은 9월 28일.

공교롭게도 18년 전 오늘은, 워킹 홀리데이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처음 일본에 온 날.


그리고 오늘, 나는 한국에 간다.

눈썹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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