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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26. 2023

당장 내일모레, 한국에 가지만

지난 주말, 많은 고민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코로나 이전과 같은 항공편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오가려는 사람 수는 많고, 엔저, 유류가 급등까지 겹쳐 LCC조차 LCC가 아니게 되었다. 예전엔 이 돈이면 아시아나 타고 맥주 마시며 집에 갔는데, 하는 마음에 좀처럼 구매 확정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우스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휴가가 짠 남편회사에서 웬일로 연말연시 휴가를 일주일이나 내주었다. 이때가 아니고는 같이 한국 가족들을 만날 기회도 좀처럼 없을 것 같아 표를 찾아보는데 마침 괜찮은 조건의 표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장 이번 주, 추석과 맞물려 일본 출국 티켓이 정말 싸게 나와있길래 그동안 꿈만 꾸고 한 번도 못해 본, '한국 길게 다녀오기'를 실행하기로 했다. 도쿄에 살 때는 유급휴가를 붙여 써도 길어야 1주일이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3주나 다녀온다. 


출국은 내일모레다. 


 




내 인생에 없었던 '성수기 비행기 표 미리 사기'와 '갑자기 사기'를 동시에 클리어한 탓인지 지금까지도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각종 항공사와 티켓 사이트 창을 띄워놓고 어디가 최저가인가, 를 한참 고민하던 괴로운 시간들. 한번 '이거다' 결정하면 그건 그대로 밀고 나가지만, '이거다'를 결정하기까지 마음이 수십 번 바뀌고 '혹시'와 '만약'을 생각해 버리는, 우유부단하고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내게 있어서 순간의 타이밍과 정보력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는 일을 결정하기란 너무 어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래도 두 개 다 나름 좋은 조건에 구매해 만족스럽지만 딱 두 가지 걱정이 있다. 


첫 번째는 남편이다.


결혼 전까지는 줄곧 본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취경험이 없는 남편. 3주나 홀로 놔두는 것이 꼭 물가에 어린아이 혼자 내놓는 것 같아 영 마음이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초창기엔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모르고,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닦은 걸레로 테이블을 훔치려 했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귈 때에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착하게 기르셨을까, 어떤 분들이 기르면 이렇게 자라는 건지, 한번 뵙고 싶다'라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함께 생활해 보니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집에서 (중략),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후략)' 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건지 콩깍지가 덜 벗겨져서 그런 건지 남편의 부족함은 남편이 아닌 시어머니의 직무유기처럼 느껴져 시어머니가 은근히 밉... 아, 안돼!! 브런치에선 시가 이야기는 쓰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도 1년 반동안 혼자 요리도 할 만큼 성장했으니 작년에 비하면야 훨씬 낫지만, 회사 다니면서 집안일하고 자기 밥 챙겨 먹고 잘할 수 있을지, 귀찮다고 본가 살 때처럼 감자칩에 맥주 마시고 저녁 먹었다 셈 치고 그러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게다가 지금도 '이렇게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당분간 이렇게 춤추는 일도 없겠지' 하면서 눈물을 글썽글썽하는 걸 보면 마음이 헛헛하다. 이러니 저러니 딱 붙어있다가 처음 떨어져 보는 건데 안녕하기도 전에 벌써 허전하다. 막상 지내다 보면 나는 엄마 아빠 그늘 아래서 오랜만에 즐기는 휴식이 이대로 계속 됐으면 좋겠다고 느낄 만큼 달달할 거고, 남편은 남편대로 처음 맛보는 '그 누구의 잔소리도 없는 오롯한 나만의 시공간'이 주는 달콤함에 정신이 혼미해지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우리는 '12년만의 첫 긴 한국'과 '첫 자취생활'에 심장이 고동치면서도 쓸쓸하고 서글프다. 앞으로 남은 하루도 기대감에 부푼 즐거운 견우직녀 정도의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야겠지. 그다음은 그냥 마냥 즐거운 너와 나, 의 시간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다른 하나의 걱정은, 냉장고 속의 가지다.


물컹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게 있어서 가지란, 눈 딱 감고 먹으려면 먹지만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기피대상이다. 반면, 나는 가지를 좋아하고, 요즘 이 계절에는 여기저기 주변 농가에서 가지를 나누어 주는 일이 많아, 남편 본인은 먹고 싶지 않지만, 나를 먹이려고 받아오곤 했다. 


지난주 내내, 열심히.


지난주까지만 해도 9월 중 나의 한국행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때문에, 열심히 모아 온 가지들은 지난 토요일을 기해 갑작스럽게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다. 기한은 28일 오전 6시까지. 그때까지 소비되지 않고 남은 가지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냉장고 한켠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아온 식재료를 버리는 일은 내가 주방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 가장 죄책감이 큰 것이라, 그제 어제오늘, 가지를 볶고 찌고 무쳐, 열심히 먹고 있다. 닭고기 옆에 같이 볶아 놓았더니 남편도 한입, 두 입 거들어 주지만 도대체 줄질 않는다. 오늘 저녁엔 날도 쌀쌀해서 신라면 끓일 건데 가지 넣어도 되려나.






근데 가지도 가진데, 그동안 쓰던 글들은 언제 마무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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