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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6. 2023

마흔이 다 되어서야 만난 인생머리

아침에 일어나면 세면대가 비길 기다려 얼굴을 씻는다.


수건걸이 옆에 세면용 헤어밴드가 걸려있지만, 잠시 뒤돌아서 머리에 뒤집어쓰는 그 찰나의 행동이 귀찮아 안 쓴 지는 꽤 된다. 대신,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을 풀어 앞, 옆, 뒷머리를 최대한 그러모아 정수리 꼭대기 부근에서 동그랗게 말아 묶는다. 숱을 너무 쳐 (내 손으로 그랬다) 동그라미의 볼륨은 갓난아기 주먹만 한 초라한 것이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숱가위를 들지 않고 딱 6개월만 버티면 그래도 조금은 풍성해질 것이다. 





단발병은 수시로 찾아온다.

슬기가, 수지가, 안유진이 한 그 단발머리를 보면, 나도 저렇게 자르면 참 깔끔하고 패셔너블하게 보일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미용실에 가 사진을 보여주고 '이렇게 잘라주세요'하지만, 두어 번 서걱서걱 가윗날 소리가 들려올 즈음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떠올린다.


단발은 최양락도 했다.


최양락, 아니, 단발머리가 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열심히 머리를 기른다. 한국에 가서 C컬파마를 하겠다는 작은 소망을 안고 머리를 기르다 보면 여름이 온다. 


숱 많은 반곱슬 긴 머리는 여름을 나기가 특히 힘들다. 두피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그냥도 더운데, 여름에는 뜨거운 바람을 오래 쐬어야 해서 모처럼 막 씻고 나왔는데도 금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범벅이 된다. 이럴 때 단발머리였다면. 슬금슬금 단발병이 다시 시작되고 거의 대부분은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로 최양락, 아니 단발머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단발→거지존→단발→거지존을 반복하며 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이번 여름엔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오늘은 최고 기온 32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쌀쌀하기까지 했으니, 밤낮 없던 무더위 공격도 조금 시들해진 것 같다.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단발병의 유혹을 무사히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바람, 이 아니라 마흔이 다 되어서야 만난 인생머리 덕분이라 생각한다. 인생머리라 해서 그게 막 너무 예쁘고 잘 어울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평소엔 왼쪽처럼 머리를 풀고 있지만, 여름은 그럴 수가 없다. 목덜미가 머리카락에 덮여 덥기도 하지만,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흘러내려 어깨가 축축하게 젖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는데, 층이 많이 난 머리는 옆머리와 뒷머리를 있는 힘껏 모아 묶어야 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머리에 딱 붙어 두피의 열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고인다. 결국 둘 다 덥다. 


그러다 발견한 대안책이 '양갈래 머리'였다. 

양갈래라곤 하나, 진짜 더울 땐 세 갈래로도 묶는다


이렇게 머리 뭉텅이(?)를 분산해 묶으면 뒤통수에 갈래갈래로 가르마가 생겨 바깥바람이 두피에 바로 닿을 수 있어 훨씬 시원하고, 층이 많이 난 머리도 깔끔하게 묶인다. 단열재는 넣고 지었는지 모를, 바깥보다 집안이 더 더운 일본 집 (*이것저것 넣고 지으면 대지진으로 폭삭 무너졌을 때 좋지 않다는 썰이 있는데 대지진 와서 깔려 죽는 거보다 쪄 죽는 게 빠를 것 같다)이라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덥지만, 그동안의 머리 중에선 여름 나기에 제일 쾌적한 스타일이라 이 머리를 더 빨리 시도하고 정착시켰다면 훨씬 삶의 질이 향상했을 것이다. 


이 좋은 양갈래 머리의 유일한 단점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굴이 뿜어내고 있는 미묘한 늙음과 대비되는 깜찍한 머리모양이 자아내는 언밸런스감은, 마치 가는 세월을 있는 힘껏 붙들어 보려 하는 것처럼 짠해 보인다. 어쩌다 남편이 올 때까지 그 머리로 있어봤더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가 흠칫 놀라며 나를 두 번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어, 어어... 그 머리 한 거 처음 봐서...'라고 머뭇거렸는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痛い(*이타이, 외관이나 행동거지 등이 실상과 맞지 않아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양상을 이르는 말)가 아니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왔는데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마누라가 어울리지도 않는 아가들 머리를 하고 있으면, 한층 더 철없고 뇌 맑아 보일 것도 이해하기에, 그 이후론 그가 돌아올 즈음이면 하나로 묶어둔다. (그래도 그렇게 깜짝 놀랄 필요는 없잖아, 이 양반아!)






어렸을 때 사진에는 양갈래 머리를 한 채 분홍색 한복을 입고, 아직 30대 초반 젊은 시절의 아빠 품에 꼭 안겨 있는 모습이 남아있는데, 그래도 그때는 이렇게나 어울렸던 머리가 대체 어디서, 뭐가 어긋나서 이리되어버렸는지 아쉽다. 나야 내 얼굴 매일 보고 있으니 나이 드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훅 지나간 변화를 실감할 때, '난 항상 내가 중학생 같은데' 같은 소릴 하면서 언제까지나 으헤헤으헤헤헤헤 하며 지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외관은 둘째치고 실용성만큼은 정말 인생 최고의 머리라, 이제 다시 한동안은 봉인해야 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지만 내년에는 초여름부터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그때까지 힘내자, 안티에이징. 


아,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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