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Aug 24. 2023

약간 과학적인 와인 칵테일

상그리아 말고, 와인쿨러

자주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

도리아 한 그릇 300엔, 에스까르고 오븐구이 400엔, 글라스 와인 한잔 100엔, 500미리 디캔터를 시켜도 400엔밖에 안 하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하는 곳이다. 그래서 용돈이 풍족치 않은 학생들이 한 사람당 300엔 하는 드링크바를 시켜놓고 빈컵만 잔뜩 쌓아가며 끝도 없는 방과 후 수다타임을 즐기거나, 아이를 데려온 젊은 부부가 햄버그를 잘게 썰어 아이 입안에 넣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거나, 퇴근 후 혼자 밥 해 먹기 귀찮은 회사원들이 한 끼 식사와 함께 맥주나 와인을 가볍게 곁들이기도 한다.


나는 무겁게 곁들이는 사람이었지만.





퇴근길에 들리기 좋고, 음식이 금방 나오고, 익숙하고, 적당한 소음이 섞인 그 공간을,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닌 '이자카야'로 쓰고 있었다. 차갑고 도도한 도시여자처럼 익숙한 듯 와인을 주문하고 집에서 만들 수 없는 요리를 실컷 시켜 혼술을 즐기고 나면, 기쁜 일은 배가 되고 부의 감정은 사그라져 들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빡친 마음을 달래려 그곳에 들렀다. 아까 기쁜 일은 배가 되고 웅앵했지만, 9할 정도가 직장에서 쌓인 화를 풀러 가는 거였다. 주문을 마치고 제일 먼저 가져다준 잔에 와인을 채우고 두 모금 꿀꺽꿀꺽 들이켜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같은 라인에 나처럼 혼자 온 여자가 앉아있었다. 뽀글뽀글하게 볶은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에스닉한 무늬가 들어간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마녀 같기도 하고 집시 같기도 한, 특별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어서 저절로 눈길이 갔다.


그녀의 테이블 위에는 내 테이블과 같은 -점원이 주문을 확인할 때 '와인 대자'라 부르고 여자 혼자는 좀처럼 주문하지 않는- 500미리짜리 레드와인 디캔터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묘한 동질감을 느낌과 동시에 어느 테이블의 엄마가 황급히 아이의 눈을 가리며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 언니들처럼 된다!' 하지 않을까 싶어, 차갑고 도도한 도시여자인데도 쭈굴쭈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디캔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박하게도, 드링크바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와인과 섞어 자기만의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고 있었다.






산토리 위스키를 샀더니 따라왔던 컵


그녀가 만든 와인쿨러는 와인에 음료수를 조합해 만드는 칵테일이다.

게다가 오렌지주스와 와인의 비중이 다름을 이용한 아주 과학적인 칵테일이기도 하다. 과즙 100% 오렌지주스를 먼저 따르고 와인을 조금씩, 천천히 따라주면 일부는 섞이고 일부는 오렌지주스 위에 뜨면서 예쁘게 층이 생긴다. 단, 콸콸 금지. 아무리 비중이 달라도 콸콸 쏟아부으면 섞여버리니까. 맛을 내기 위해 리큐르나 시럽을 넣기도 한다지만, 레드와인과 오렌지주스만으로 심플하게 만들어도 충분히 눈과 입이 즐거워진다.



또 사은품 컵


층을 예쁘게 내려면 최소 비율은 1:1, 쉽게 만들려면 오렌지주스가 약간 더 많은 쪽이 좋다.

이렇게 스푼을 대고, 천천히 부어 잔 벽면을 타고 흐르게 하는 것도 방법. 잔도 둥근 것보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것이 더 잘 만들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눈으로 즐긴 다음에는 머들러로 가볍게 저어 섞어 마시면 상그리아처럼 상큼하게 마실 수 있고, 그냥 마셔도 마시다 보면 다 섞여서 (그리고 취해서 잘 모른다)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방법을 터득한 나는, 그 이후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종종 와인 쿨러를 만들게 되었다. 그녀처럼 새 디캔터를 달라고 해 만들어 볼 용기는 없어 드링크바에서 오렌지주스를 한잔 가져와, 와인글라스에 붓는 식이었지만, 와인쿨러를 만드는 그 행위 자체가 나의 이자카야를 분위기 있는 바로 만들어 주었고, 헛헛한 마음을 더 따스하게 채워주었다. 물론, 그곳이 시끌시끌한 저가 패밀리 레스토랑이란 현실엔 변함이 없고, 오렌지주스까지 섞어 더 꿀꺽꿀꺽 마시기 쉬워진 와인은 나를 더 빨리 꽐라의 길로 인도해 주었지만.






지난 주말에는 한참 와인에 안주 만들어 먹는 재미에 푹 빠진 남편에게도 맛 보여 주고 싶어,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나는 집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을 테니, 와인과 100% 오렌지주스를 사다 달라고 했다. 무슨 와인에 주스를 섞냐며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는데, 두 번째 잔을 만들 때는 나의 제조법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세 번째 잔부터는 본인이 만들어서 내게도 말아주었다. 역시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니깐.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마녀 같기도 하고 집시 같기도 했던 그녀는 내게 와인쿨러의 존재만을 남기고 그 후 두 번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그녀를 떠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은 한국풍 양닌 카브리사루에 소주 한잔 어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