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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Dec 08. 2023

나의 크리스마스 리스트

「大人になったけれど、助けてくれますか (어른이 되었지만, 도와줄 수 있나요?)」


일본가수 히라하라 아야카가 데이비드 포스터의 'My grown-up christmas list'를 일본어로 번안해 발표하며 원곡 가사 'Well I'm all grown up now, and still need help somehow'를 위와 같이 번역했다.


전체적인 의미는 비슷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마음이 더럽혀진 내 귀에는 요 부분만 똑 떼서 들으면 어릴 때 집 나간 손자가 늙은 할머니를 20년 만에 찾아와 '할머니, 나 다 컸지만 아직도 할머니 손자야. 그러니까 제발 좀 살려줘, 이번 거 못 막으면 나 진짜 끝이야'라며 돈 좀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처럼 들린다. 겨울이 되면 항상 이 노래를 떠올리는데, 특히 이 부분의 멜로디가 인상적이라 설거지할 때나 청소기 돌릴 때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손만 움직이는 단순작업을 할 때에는 여기만 골라 엔드리스로 흥얼거리게 된다. 아주 서정적인 멜로디에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가사는 '할머니, 나 좀 도와줘 제발. 응?'으로 들리는 기적. 


기왕이면 올해는 나도 좀 도와줘. 응?





그동안 줄곧 '한번 사볼까'하다가도 막상 때가 되면 주저해 오던 연말 점보 복권.

올해는 사기로 했다. 한 장에 300엔인데 1등이 당첨되면 7억 엔, 2등은 1000만 엔이지만 내가 노리는 건 물론 1등이다.


이날을 위해 지난 1년 간, 나는 얼마나 많은 액땜들을 해 왔던가.

브런치북 응모에 1초 차이로 응모를 못한 것도, 왜제 시월드에 마음 상해 눈물 콧물 짜던 것도, 악플때문에 기분 더러웠던 것도, 흰머리가 많이 생긴 것도, 코로나에 걸렸던 것도, 불볕더위에 사랑하는 다육이 절반을 요단강 건너 보낸 것도, 요긴하게 쓰던 진공 유리병이 갑자기 폭파된 것도, 불면증에 잠을 못 이뤘던 것도, 브런치를 반년 가까이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이건 백 퍼센트 내가 구려서인가) 다 복권에 1년 치 운을 털어 쓰기 위해 선불로 긁어온 악운들이었다. 아, 눈에서 땀이 다 나네.


복권 당첨되게 해주세요


우리나라에서 날짜를 골라 이사를 하고 결혼날짜를 받듯, 일본에도 택일의 개념이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날을 골라 가려고 찾아보는데 마침 지난 토요일이 복권 판매기일 이내에 있는 유일한 타이안 (大安, 뭘 해도 좋은 길일) 이어서 그날 복권을 사러 가려했다.


그런데 주말은 아니지만 다른 길일이 줄줄이 겹친 날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다.

타이안에 이치류만바이비(一粒万倍日, 한 알의 밀알이 만 배가 되어 돌아오는 날)와 겹쳤다는 것이 아닌가.


"더 좋은 날이 있으면 그날 가야지!"


요즘 남편은 일이 바빠 한 달 반 정도 칼퇴는커녕 매일 잔업 중이다. 오늘 복권 사러 가려면 칼퇴하고 바로 와야 할 텐데. 게다가 오늘 저녁엔 회사 송년회도 있어서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판매점에서 사라 했더니 꼭 둘이 같이 가서 기를 불어넣어야 한단다. 조금 아쉬운 날이 되겠지만 그냥 길일이라면 또 있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외벌이의 고됨일까? 어제부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칼퇴해서 복권 사고 송년회 갈 것'이라고 다짐하는 그의 눈빛에는 결연함 마저 서려 있었다. (미안하다...)


"근데 복권 살 때 뭐라고 하고 사야 해?"


궁금증도 서려 있었다.

글쎄... 일본인도 모르는데 외국인인 내가 그걸 알까..?


그래서 어젯밤에는 둘이 유튜브를 보면서 복권 사는 법을 숙지했다.

'몇 장 주세요'가 아니라, 조와 번호가 연속된 '렌방(連番)으로 몇 장 주세요'나 비연속적 랜덤번호인 '바라(ばら)로 몇 장 주세요'하는 식으로 사야 하는 모양이다. 렌방으로 사면 1등 당첨 시 앞뒷번호상까지 다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기는데 그럼 총상금은 총 10억 엔이 된다. 반면 바라로 사면 그 앞뒷번호상까지는 바랄 수 없지만 복권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어차피 될놈될, 우리는 될 놈이다'를 되새기며 일단 20장은 바라로 사 보기로 했다.

이번 시드는 맥스 30장이다. 나머지 10장은 지금도 고민 중이고, 이 30장이 고액당첨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해 내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원하는 선물 목록, 크리스마스 리스트 1번이다.


참고로 아까 내가 '할머니, 이번만 좀 도와줘'로 만들어 버린 그 노래 뒷부분에 담긴 크리스마스 리스트는 이것이었다.


-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

-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 시간이 모두를 치유하고

- 친구가 되고

- 정의가 이기고

- 사랑이 영원할 것


숙연해진다.


그래도 이번만 좀 도와주세요.





내 크리스마스 리스트는 사실 하나 더 있다.

크리스마스에 이루어지면 너무 늦고, 꼭 오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아까 오늘 남편 회사 송년회가 있다고 지나가듯 말했는데, 사실 이와 관련해 남편은 나와 약속을 하나 한 것이 있다. 그는 밖에서 술을 마시면 자꾸 꽐라가 되어서 들어온다. 신이 나서 그랬겠거니, 하면서도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선 어디서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그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수발과 숙취에 나도 본인도 아주 고통스럽다. 아니 이봐, 술은 마셔도 마셔지진 말아야지.


그렇게 해서 만약 오늘 남편이 꽐라가 되어서 돌아왔을 경우, 그의 인생에서 회식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나는 진실로 이르건대, 그에게서 회식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둘이서도 잘 놀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재미와 회사 사람들이 줄 수 있는 재미의 스펙트럼은 다르니까, 가끔은 회사 사람들이랑 술 한잔 기울이면서 일 이야기도 하고 회사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마누라한테 당하는 이야기도 서로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어야 숨통이 좀 틔이지 않겠는가.


우리 남편이 오늘은 술 적당히 먹고 말짱히 두 발로 걸어오게 해 주세요



이미 나도 남편도 어른이 되었지만, 부디 내 크리스마스 리스트가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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