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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30. 2023

거기에 당근은 없었다.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잘 먹느냐'가 아닐까 한다. 아니, 사람이 돼지도 아니고 무슨 먹는 것만 생각하고 사냐는 생각이 드신다면 아주 잘 보셨습니다, 저는 돼지입니다, 꿀꿀, 부히부히 꿀꿀. (*부히부히: '꿀꿀'의 일본어 표현) 


요즘 어지간한 것은 일본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코리안타운이 형성된 도시에서의 이야기다. 한국 음식점이 있는 둥 마는 둥 한 우리 동네에서는, 먹고 싶으면 레시피를 찾아 직접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료에도 한계가 있어 한국에 갈 때까지 메모장에 이름을 적어두고 참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송어회, 선짓국, 짜장면, 술떡, 산낙지..., 없어서 못 먹으니 더 먹고 싶다. 이름만 들어도 침이 꼴깍꼴깍. 


그래서 한국에 갈 일정이 정해지고 나면 메모장 어플을 탈탈 털어 이번 여정에서 반드시 먹어야 할 것들을 몇 개인가 골라둔다. 사람의 위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 시점을 기준으로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내림차순으로 추려내야 한다. 그 안에는 내가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굳이 이름을 올리는 것들도 몇몇 끼어있다.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 청양고추로 칼칼하게 끓인 된장찌개, 콩나물밥, 그리고


또, 김밥.







소풍 가는 날, 엄마는 항상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줬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삼삼오오 마주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면, 각 가정의 음식문화를 대변하듯, 닮은 듯 다른 김밥들이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어떤 집 김밥에는 얇은 어묵이, 어떤 집은 오이나 우엉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집 김밥은 햄, 계란지단, 당근, 시금치, 맛살, 단무지가 들어가는 그냥 보통의 옛날 김밥이라 다른 집 김밥들이 그렇게 세련되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아, 우리 집 김밥이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긴 있었다. 간해서 볶은 돼지고기를 김이 식기 전의 고슬고슬한 쌀밥과 뒤섞어 김밥을 말고, 칼로 자른 김밥 위에 깨를 뿌리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싫었다. 다른 집처럼 몰캉몰캉하고 안의 재료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김밥이면 좋겠는데 밥알에 섞인 돼지고기는 입안에서 따로 놀았고, 깨가 이 사이에 끼기도 했다. 김밥이 풀어질까 그랬는지 단순히 많이 먹으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김밥을 말 때 항상 꾹꾹 눌러가며 크게 말았기 때문에 다른 집 아기자기한 김밥들보다 모양도 투박하고 도시락을 열 즈음에는 딱딱하게 굳어 입안 가득 넣고 한참을 오물거려야 겨우 삼킬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김밥을 나눠 먹을 때도 선뜻 내 것도 먹어보라고 내밀을 수가 없었다. 너네 엄마 김밥 맛없다고 할까 봐.  



마지막으로 먹은 건 이미 십수 년도 전이다. 

추억이라고는 '다른 집 김밥보다 못생김', '먹다 또 체함', '좀 부끄러움' 이런 기억 밖에 없는 그 김밥이었는데, (여기까지 적고 보니 어쩌면 나는 엄마의 김밥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보여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된 일인지 오랜만에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청양고추를 넣은 칼칼한 된장찌개 옆에, 콩나물밥 앞에 '김밥'을 적어 넣고, 한국에 가자마자 언제든 상관없으니 우리 집 김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의 김밥은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날 저녁에 먹을 수 있었다.

코로나에 걸렸다가 막 기력을 회복한 직후라 해달란 말도 못 하고 시간만 흘러갔는데, 엄마가 오늘은 김밥을 먹자하여 같이 서서 고기를 볶고 계란 지단을 썰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썰어야 한 번에 예쁘게 잘리지. 어휴, 됐다. 저기 가서 강아지들이랑 놀고 있어."


우리 집에선 내가 잔소리하는데, 집에 오니 엄마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잔소리를 당했다. 

잔소리하고 싶어지는 버릇은 아마도 유전일 것이다. 64년 경력자에겐 비벼보지도 못할 실력차가 존재하고. 






엄마가 김밥을 마는 사이, 얌전히 거실 바닥에 앉아 강아지 털을 빗겨주고 있는데 엄마가 혼자 '아...' 하고 탄식했다. 


"왜? 무슨 일이야?"

"당근을 안 넣었어."



김밥을 다 말고 이제 막 칼질을 두어 번 시작했는데, 공간이 모자라 저 옆에 놔두었던 볶은 당근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미 다 말았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먹기로 했다. 어차피 당근은 색깔 구색 맞추려고 넣는 것일 테니 상관없다. 어차피 김밥 맛은 단무지가 좌우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하나 입에 와앙 넣고 보니 당근의 빈자리가 크다. 당근 맛이 뭐냐고 물어보면, 당근이 들어있기에 당근 맛이 난다 하였는데 당근 맛이 무엇이냐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사옵... 뭐라 딱히 표현할 수도 없는데 막상 없으니 빈자리가 딱 드러난다. 재료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내는 맛이 '김밥 맛'이었구나. 


그런데 엄마의 김밥이 조금 달라졌다. 

당근은 실수지만, 우엉이 들어가고 깨가 빠졌다. 그리고...


"우엉 넣었네?"

"응."


평소대로라면 '더 맛있으라고 넣어봤어'라던가, '있길래 넣어봤어'라고 발랄하게 대답했을 텐데, 오랜만에 딸 먹으라고 만든 김밥에 당근을 잊은 것을 속상해하는 엄마에게 '당근 없어도 엄마 김밥은 역시 맛있네. 우엉 들어가서 더 맛있는 듯!'이라고 나 나름의 위로와 감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엄마의 김밥에서 가장 달라진 것은 당근이 빠진 것도, 우엉이 들어간 것도 아니라 예전처럼 팔힘으로 꾹꾹 눌러가며 만들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만들게 되지 않은 것인지,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근이 들어갔든, 들어가지 않았든, 밥이 딱딱하든 말캉하든, 모양이 예쁘든 못생겼든, 언젠가는 먹고 싶다고 졸라도 엄마의 김밥을 먹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눈물이 왈칵 흘러넘칠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김밥을 다시 하나 입에 밀어 넣었다.


"어, 근데 맛살도 빠졌는데"


마음에도 없는 밉살맞은 소리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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