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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28. 2023

말이 씨가 되는 과정

슬슬 겨울옷을 새로 장만하자고 말해왔지만 막상 주말이 되면 움직이기가 싫다. 어느 날은 추워서, 어느 날은 집안 대청소를 해야 해서, 어느 날은 느긋하게 있다 보니 조금 있음 해가 질 것 같아서.


그렇게 이주를 내리 미루다 오늘이야말로 꼭 나가자고 아침 10시에 출발하자 약속까지 한 참이었다. 그런데 일어나 바싹 구운 토스트에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니 어제 보다 만 드라마가 생각났다. 병아리 간호사의 성장일기를 예쁘게 그린 드라마일 거라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묵직한 울림이 있는 그 드라마. 환각증상으로 입원한 고시 장수생 (그것도 딱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되는) 이야기 그 뒤가 궁금했다. '보다가 중간에 끊자'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충격의 결말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곗바늘은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 저거 봐. 우리 차 번호랑 똑같아"

"방긋방긋 (니코니코, 2525) 세대 째"

"8282는 옛날에 삐삐칠 때, 빨리빨리 대신에 누르던 번호야"


바람을 휘감듯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

언젠가부터 조수석에만 앉으면 다른 차 번호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너의 사연이 있는 희망번호일 수도 있고, 등록사무소가 정해준 의미 없는 랜덤번호일 수도 있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네 자리 숫자들을 헤아려보거나, 음을 읽어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서 가면, 볼 것이라곤 집과 밭, 논뿐인 거리도 조금은 재밌어진다.


이 날은 유독 내 생일에 가까운 차번호가 많았다.

1014, 1013, 1115, 같은 배열에 숫자 하나씩만 다른 아쉬운 숫자들이었다.


"딱 하나씩 비켜나가네"






비켜나간 것은 숫자만이 아니었다. 이거다 싶은 옷이 없어 몇 군데 돌아봤지만 빈 손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고 보면 입을 게 없으니 새 옷이 있어야겠다, 는 생각만 했지 어떤 옷을 사야겠다는 이미지는 딱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하다 보면 옛날에 산 다 떨어져 가는 옷을 빈티지의 멋스러움인 척 걸치고 다니게 되는데 그러고 돌아다니다 보면 그 상황에 익숙해져서 새 옷은 잊고 그냥 그렇게 살게 된다. 직장이 있을 때는 사람들 앞에 서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통근옷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절박한 필요성도 없으니 더더욱.


소기의 달성도 없이 근처 상점가를 두리번거리다가 서점이 있던 자리 일부에 가챠샵이 들어온 걸 보았다. 잠깐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이것을 발견했다.


11월의 신작, 바비큐 케이블 액세서리


거실에는 핸드폰 충전 케이블 두 개를 꺼내놓고 쓰고 있는데, 선 길이가 짧은 것은 코드 가까이에 앉는 나, 긴 것은 멀리 앉는 남편이 쓴다. 항상 어느 쪽이 어느 것이었던가 선을 주욱 당겨봐야 알았는데 이걸 달아놓으면 한눈에 어느 선인지 알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좋은데? 뭘 제일 갖고 싶어?"


우리가 가챠를 뽑을 때마다 남편이 묻는다.

이제까지는 둘 다 '이거'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뽑으면 원하던 것이 나오는 일이 많았다. (아닐 땐 아니지만)

그래서 남편은 항상 묻는다. 뭘 갖고 싶냐고.


"2번 아니면 4번! 1번도 귀여운데 모양이 똑같으니까 케이블에 끼워놔도 누구 선인지 분간이 안 가서 이건 안 나왔으면 좋겠고"

"안돼!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강하게 2번을 빌어. 나도 그거 빌 테니까"

"그래. 그럼 돌린다!"


그리고 결과는,   


보이는가, 이 마블링 실루엣


"아..., 역시 안 나왔으면 좋겠는 거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었어..."


제일 안 나왔으면 좋겠는 1번 고기 세트가 나와버렸다.



귀엽긴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끼워놓아도 분간이 가지 않는,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케이블 액세서리를 손에 넣었다.

사실 한번 더 해서 가챠 머신의 예시사진처럼 줄줄이 끼워놓는 것도 방법이었겠으나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 사우나 7, 모모타로의 비극





작년 9월의 일이다.

인근지역 쇼핑몰 내에 있는 가챠샵에 평소 좋아하던 가챠시리즈가 들어온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갔다.

원래 목표로 하던 가챠에서 한방에 제일 원하던 것 (오목눈이 피규어)를 뽑고 나니 묘한 자신감이 붙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이 기세를 몰아 하나 더 뽑아보자'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이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물사우나 7 - 모모타로, 개, 고양이, 아기판다, 카피바라


무릎에 수건을 두르고 앉아 땀을 빼는 동물들이 너무 귀여웠는데, 시선강탈은 모모타로가 하고 있었다. 아아, 다 그럭저럭 귀여운데 모모타로만큼은 뽑고 싶지 않았다. 혼자만 묘하게 좀 징그럽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남편이 물어왔다.


"뭐 뽑고 싶어?"

"제일 뽑고 싶은 건 판다, 다음은 개"

"난 고양이도 괜찮은데."

"고양이도 괜찮지. 카피바라는 색깔이 어두워서 그런가 좀 그렇지만 그래도 모모타로만 아니면 돼!"

"모모타로 별로지?"

"진짜 싫어. 절대로 안 나왔으면 좋겠어."

"나도. 그럼 모모타로 이외의 것이 나오길 빌자"

 

간절히 모모타로 이외의 것이 나오기를 빌었건만, 주먹을 펴자 나온 것은 모모타로였다.

처음엔 실소가 터졌다. 왜 하필 너니. 이번엔 다른 층 가챠머신에서 뽑아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모모타로겠냐고. 정성이 갸륵해서 다른 거가 나와줄 거야."

"이렇게 말했는데 또 모모타로 나오고"

"그럼 진짜 웃기겠다"


처음, '원하지 않는 것'을 한마음 한뜻으로 빌었을 때 모모타로가 나온 순간, 나는 눈치챘어야 했다.

그것만 하고 집에 갔어야 했는데. 아니, 적어도 입이라도 다물고 또 뽑았어야 하는데. 그놈의 입방정.

어리석었다.

  

"자, 뽑는다."

이때의 나는 긴장으로 침까지 꼴깍 삼키며 레버를 돌렸지만,


"제발 모모타로 이외의 것으로!"

남편은 손까지 모아 기도했지만,


"모모타로 이외의 것으로!"

함께 소리 내어 기도했지만, 또 모모타로였다.






다른 층까지 따라온 2연속 모모타로의 기적.

1지망은 아닐지언정, 2지망, 3지망이 나와주어도 좋았을 텐데 왜 또 고르고 골라 모모타로인가.

아까 내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에코가 걸린 채 울려 퍼졌다.


그럼 진짜 웃기겠다-

그럼 진짜 웃기겠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내 반드시 모모타로 이외의 것을 뽑아주겠어. 전매특허, 가자미 눈으로 머신 들여다보기를 시전 했다. 같은 종류끼리 캡슐색이 같은데, 모모타로의 수는 적고 입구 근처에는 판다 (적어도 모모타로는 확실히 아님)로 보이는 캡슐이 내려와 있었다.


다시 한번 레버를 돌리는 나.

아까 본 파란 캡슐은 판다가 아니라 카피바라였다.  

모모타로 다음은 또 너냐.


"카피바라도 이렇게 보니까 귀엽네."


남편이 애써 위로해 주려 했지만 내 눈에서는 불이 이글거렸고, 결국 다음에 2 지망이었던 개가 나오고 나서야 이상한 물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왘! 개 나왔다! 빨리 여기서 떠나자!"


도망치듯 쇼핑몰을 나오며 우리는 패인을 분석했다.


"원하는 것에 집중했어야 하는데, 원치 않는 것에 집중한 게 문제 아니었을까?"

"그래. '이건 원하지 않는다'라고 너무 간절히 '원해서' 그렇게 된 걸 거야"


여기까지 대화를 하다 보니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왜, 말이 씨가 된다라고들 하잖아?"

"응"

"그거 진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는 많은 마이너스 사고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과정.

예를 들어, 안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들이나, 어려워라고 손대기 어려워하는 것들을 그렇게 실현시켜 버리는 것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버린 우리들 스스로가 아니었을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야 하는데,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문제였던 거 같아. 그러니까 실패나 거부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세상사를 포지티브 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야 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 좋게 생각한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말하다 보면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도 할거고 말이야. 그러니까 앞으로의 삶의 자세를 좀 바꿔보자고. 그리고 복권 당첨 이런 건 1년 내내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많이 말하고"

"기정사실화?"

"응. 근데 가챠 이게 뭐라고 우린 삶의 자세까지 운운하고 있는 거냐"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 뽑기를 한번 더 뽑았다면 또다시 모모타로의 기적이 재현되었을까? 아니었을까? 를 생각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지난주부터 연말점보 복권 판매가 개시된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다음 타이안 (大安, 일본의 길일 중 하나)이나 다른 길일 조사해서 그날 복권 사러 가자"


연말연시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올해부터는 매해 복권을 사보자는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복권당첨을 위한 전략으로 나는 '말이 씨가 된다'를 채택하여, 이미 올여름부터 남편에게 '복권 당첨될 거 돈 어떻게 굴릴지 생각해 봐. 최종결재는 내가 낼 거지만'이라며 꾸준히 뻔뻔한 얼굴로 오더를 내리고 있다.


"오늘이 타이안인데?"

"어? 어떻게 알아?"

"저기 쓰여 있는데"


남편의 손끝을 따라가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복권 판매점이 있고 '오늘 타이안'이라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갑자기 복권 생각이 났고, 왜 여기 복권 판매점이 있고, 게다가 오늘 왜 타이안인가. 이것은 오늘 복권을 사라는 계시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미 가챠를 한번 망쳐서 자신이 없었다.


"근데 마음의 준비가 덜 됐으니 다음에 하자."


그렇게 집에 가는 길, 싱숭생숭한 마음에 '역시 지금이라도 복권을 사러 가야 할까?' 하는데, 남편이 솔직히 자기도 아까 깜짝 놀랐다고 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란 생각이 들었다고. 그런데 오늘 복권을 사자 하지 않은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근데 우리 오늘 가챠 망쳤잖아. 오늘은 날이 아니었을 거야"

응....


"오는 길에 본 다른 차 번호도 다 생일에서 숫자 하나씩 달랐고."

오...?


"하물며 아침에 본 드라마 봐봐. 등장인물이 딱 1문제 차이로 7수를 했어"

듣고 보니, 오늘 샀으면 숫자 하나 차이로 황되는 루트였을 것 같다.


"그럼 토요일에 제니아라이벤텐 (銭洗弁天, 돈을 물에 씻으면 그 돈이 영험해져 큰 돈으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는 신사)에서 돈 씻어와서 복권 사보자!"






방금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12월 2일은 또 타이안이다.


아브라카다브라.

다 이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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